매일신문

[종교칼럼] 어른과 책임의식

어른은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이다. 민주 사회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어른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노인들에 대한 경로를 부인하는 말이 아니다. 어른의 가치와 행위를 두고 한 말이다. 어느 사회이든 책임지는 자를 존중하고 따른다. 어른이 책임을 회피하거나 무기력하다면 그 공동체는 쇠퇴할 것이다. 그래서 어른은 책임의식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자여야 한다. 그럴 때 진정 어른이라고 불린다. 가족 간에 부르는 말로 시어른과 장인어른이 있다. 아들을 장가보내거나 딸을 시집보낸 후에 붙여진다. 그렇지 못했을 때는 그 이름을 얻지 못한다. 자식을 낳아 길러 결혼을 시키기까지 아버지로서 그 책임을 다한 결과의 붙임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간혹 어른스럽다는 평을 할 때가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자기 일에 책임감을 갖고 끝까지 애를 써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말한다. 어린아이가 애 같아야지 너무 영감 냄새가 난다고 핀잔을 줄 때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아이를 나무라는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도 책임감을 가르쳐야 한다. 아이의 책임은 작은 것이다. 작은 것부터 책임지는 습관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리더십을 갖고 어른이 되어 갈 것이다.

책임의식을 가진 자는 융통성이 있다. 독선주의자가 아니다. 어떤 일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자기를 비우고 변해야 할 때도 있다. 그 일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한다. 몸뿐 아니라 생각과 삶의 방식조차도 바꾼다. 그러나 자기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자는 책임보다는 자기를 더 중요시한다. 자기의 생각과 습관, 자기의 입장을 우선시한다. 그래서 책임은 뒷전이다. 자존심이 강한 자는 자기의 변신에 대의명분을 요구한다. 책임보다는 명분이 앞선다.

남한산성이란 영화가 요즘 세간의 화제이다. 호조와 이조의 논리 대결은 불꽃이 튀길 정도로 치열하다. 둘 다 대단한 논리를 갖고 있다. 세간에서도 그 논리를 좇는 자들이 같은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쪽도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는 나라의 국운과 역사를 염려하고, 다른 한편은 전쟁 통에 죽어가는 백성을 염려함에서 나온 것이다. 호조판서는 국가와 역사의 충신이고 이조판서는 백성을 살린 아버지가 되었다. 국가냐 백성이냐를 두고 싸운 것이지만 두 분 다 나라와 백성에 대한 책임의식이 투철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둘 다 자기를 변신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랬다면 책임감에 머물지 않고 책임을 진 역사의 영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책임을 진 한 분의 이야기를 보태고 싶다. 바로 예수님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죄에 책임을 지려고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다. 그렇게 하려고 자기를 비우셨다. 자기를 부수셨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예수님에겐 의미가 없다. 책임을 지기 위한 사랑뿐이었다.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책임지는 길을 가신 것이다. 이 예수의 길을 본받아 따라간 분이 있다. 곧 예수님의 사도 바울이다. 그는 죄로부터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변신시켰다. 그의 편지에 이런 고백이 나온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으로,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강한 자에게는 강하게,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자기를 변신시켰다. 이것이 로마 제국 치하에서 기독교를 갈릴리의 작은 지역 종교에서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시킨 선교의 원리였다.

오늘 우리 한반도에 이런 융통성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 민족이 전쟁의 불구덩이에 빠지지 않으려면 책임감을 갖고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위하여 명분을 버리고 자기를 변신시킬 수 있는 그런 어른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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