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사고때마다 정치 공방
책임 추궁과 원인 규명 혼동
뼈아픈 실패 거듭하는 나라
제천 경험 허비하지 말아야
이런 걸 '안 봐도 비디오'라 하던가.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수습과정이 그렇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지난 5일 제천에서 '제천화재참사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촉구' 기자회견을 했다. 논란이 일자 김 원내대표는 "책임자 처벌은 하위직 공무원이 아니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사퇴와 소방청장 파면"이라고 밝혔다. 형사처벌과 정치공방. 대형사고 때마다 익숙한 풍경이다. 제천 사고에서도 이미 건물주와 관리인이 구속되었고, 소방관들, 담당 공무원들에게도 책임을 물을 태세이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대형사고 수습과정은 그렇게 흘러 왔다. 세월호 같은 대형사고는 구속자도 많고 장관과 대통령에게까지 책임 추궁이 미쳤다. 제천 사고의 경우 현장 중심으로 희생양을 찾는 모양이다. 유족들의 해원이 아니더라도 사고에 책임이 있는 자는 누구라도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 문제는 책임 추궁과 원인 규명을 혼동하는 것이다. 처벌보다 더 절실한 것은 사고원인 규명이다. 구조과정에서 대안은 없었을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일벌백계와 정치공방을 앞세우면 이성적인 접근은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이번 사고도 낡은 비디오 틀 듯 똑같은 과정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하타무라 요타로 도쿄대 명예교수는 이른바 '실패학'의 대가이다. 그가 말하는 '실패에서 창조로 거듭나기 위한 핵심 노하우 10가지'는 실패학의 집대성이다. 그는 '책임 추궁과 원인 규명을 확실히 구분하라'고 한다. 원인 규명에 앞서 처벌할 사람부터 찾는 우리에게 우선 적용해야 할 경구이다. 온 국민의 트라우마가 된 세월호 사고는 어땠나. 선장은 무기징역, 선원들과 청해진 해운 책임자들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공직자는 현장에 출동한 해경 123정장이 유일하게 형사처벌을 받았다. 검찰은 열심히 수사해서 책임 추궁을 했지만 세월호 사고 원인은 아직도 미궁 속에 있다. 정치공방으로 점철되었지만 국정조사, 특별조사도 거쳤다. 시한폭탄 같은 배가 버젓이 돌아다니는 게 가능했던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낡은 배의 운항 금지 등 규제가 강화되었지만 언제 또 유사한 사고가 날지 조마조마하다.
제천 사고를 둘러싼 논쟁은 아직 진행형이다. 일찍 창문을 깨고 2층에 진입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반면 이번처럼 막힌 건물에서 창문을 파괴할 경우 산소가 급격히 유입되어 폭발(백 드래프트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소방관이 다 죽어도 2층에 갇힌 사람은 구할 수 없었다는 현직 소방관의 말이다. 무전기가 먹통이어서 119상황실이 받은 구조요청이 현장에 전달되지 않았다는 기사도 나온다. 그런가 하면 현장지휘관에게 2층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고도 한다. 가연성 외장재를 사용하고 불법 증축을 허용한 건축행정도 도마에 오른다. 막힌 비상구를 그대로 둔 채 합격점을 준 소방점검도 문제다. 곪은 곳이 한두 군데일까. 구조적 문제점을 찾고 대안을 모색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처벌과 규제 강화라는 전가의 보도 처방으로 귀결된다면 희망은 없다.
지난해 말 한 지인이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위대한 국가라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리는 없다. 그저 그 경험을 절대 허비하는 법이 없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눈앞의 현상만 보지 말고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라.' '실패 사례를 분석한 뒤 조직원들끼리 공유하라.' '실패를 불러온 부서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라.' '실패의 책임은 개인보다 조직이 안고 가야 한다.' 하타무라 교수의 노하우만 염두에 두어도 제천 참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부지기수다. 이런 디테일에 강하지 않으면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없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헌법만 바꾼다고 평범한 나라가 갑자기 위대해질 리 만무하다. 현장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달린 문제들이 달라지지 않는 한 빛나는 헌법은 무의미하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꺼지고, 배가 가라앉고, 빌딩이 불타고…. 뼈아픈 실패를 거듭한 대한민국이다. 그런 경험을 허비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위대한 나라까지는 아직 바라지 않는다. 새해에는 좀 더 안전한 나라가 되기를, 제천의 경험부터 허비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노동일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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