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후 대구 서구 한 섬유업체 앞. 2t 용량의 탱크로리 차량에서 운전기사가 내렸다. 운전기사는 정문에서 20m가량 떨어진 저장탱크에 호스를 연결하고 과산화수소 용액을 옮겼다. 과산화수소는 주로 표백제로 쓰이며 농도에 따라 중증 화상, 실명, 사망까지 유발하는 산성 물질이다. 관련 규정에 따르면, 이 같은 유해 화학물질 용액을 운반할 때 차량이 공장 내 저장탱크 앞까지 이동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개선해야 한다. 용액이 유출되면 토양 및 지하수 오염이나 인명 피해를 유발할 수 있어서다. 그러나 이 업체는 저장탱크 주변에 차량을 댈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시설 개선을 미룬 상태였다.
올해부터 본격 적용되는 화학물질관리법(이하 화관법)을 두고 '유명무실'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영세 사업장에 적용되던 각종 유예기간이 대부분 끝났지만 비용 부담 등을 이유로 시설 개선을 미루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화관법은 유해 화학물질의 운반'보관'진열 규정을 대폭 강화했다. ▷화학사고 시 예상되는 피해 평가서 작성 ▷취급시설 기준 강화 ▷화학물질 관련 기술사'석사 이상 관리인력 고용 등이 주된 내용이다.
정부는 지난 2015년 이 법을 시행하면서 영세 사업장의 부담을 줄이고자 상당수 규정의 적용을 지난해까지 유예했다. 대구환경청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대구경북의 화학물질 취급 허가 업체는 대구 588곳, 경북 687곳 등 1천275곳에 이른다. 이들 중 대부분이 강화된 화관법 적용 대상이다.
그러나 관련 업체들은 강화된 법 규정에 따를 여력이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달서구 한 도금업체 관계자는 "규정에 맞춰 저장탱크와 방류벽(물질이 넘쳐 유출되는 것을 막는 벽) 간 거리를 넓히려면 새로 저장탱크를 사거나 공장 부지를 확장해야 한다. 유해화학물질 전문가를 추가 고용할 비용도 없다"고 했다. 지역 한 섬유업체 관계자도 "관련 업계 차원에서 법 개정을 촉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반면 인근 주민과 해당 업체 종사자 등은 엄격한 법 적용을 요구하고 있다. 달서구 갈산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모(55) 씨는 "지난 2014년 근처 공장에서 유독가스가 누출돼 주변 공장 직원과 상인들이 모두 대피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처럼 유해 화학물질은 목숨도 앗아갈 수 있는 만큼 더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구환경청 관계자는 "영세사업장 사정을 고려해 유예와 더불어 대안도 내놨던 만큼 더 이상 적용을 미루기 힘들다. 오는 5월까지 법 위반 사항에 대한 자진 신고를 받은 뒤 본격 제재에 나설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편 환경부는 지난 2014년 이전 설립한 영세사업장 중 화관법을 지키기 어려운 사유와 안전성 확보 방안 등을 제출한 기업은 안전성을 평가한 뒤 규정을 완화 적용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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