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거꾸로 신고 나온 시에미/ 상희구 지음/ 오성문화 펴냄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는 트로이전쟁을 다룬 대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2만7천803행의 시에는 그리스 연합군과 맞서 싸운 트로이군의 무용담이 잘 묘사돼 있다. 역사라는 다큐 영역과 수사(修辭) 영역인 시가 만나 역사 서사시로 결합한 것이다.
성격과 방향은 조금 다르지만 대구에도 지역의 역사와 풍물을 소재로 연작(連作) 시집에 몰두하는 시인이 있다. 최근 '신발 거꾸로 신고 나온 시에미'를 펴낸 상희구 씨다. 100편의 연작시에는 태조 왕건의 팔공산 전투와 대구의 성곽, 역참, 봉수 등 대구의 향토사를 다루고 있다. 시(詩) 형식이지만 역사서로 내용도 충실해 일독하는 것만으로 대구 역사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텍스트가 토속 방언으로 쓰여져 대구의 원형질에 더한층 다가설 수 있다.
◆대구 사투리로 역사, 인문학 형상화=호머가 트로이에서 용감히 싸우는 트로이군에 집중하듯 저자의 모든 시재는 대구의 역사, 인문 분야에 집중되고 있다. 대구의 DNA를 복원하는 소재로 저자는 대구 토속 방언을 택했다. 이 사투리로 대구의 언어, 대구의 정서, 대구의 서사, 대구의 인문(人文)을 투박하게 복원했다.
저자의 역사시 출발은 1989년 '발해기행'이었다. 1987년에 등단한 시인은 그 설렘과 기쁨을 역사시로 풀어냈다. 1996년 '요하의 달'로 이어진 그의 역사기행은 2010년에 이르러 큰 전환기를 맞게 된다.
"외국 역사(주로 민족사)를 작업하다 어느 순간 고향 대구가 떠올랐어요. 민족사를 찾아 대륙을 누비는 것도 좋지만 나의 DNA가 살아 숨 쉬는 대구를 장편 서사로 옮겨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전 40년간 고향을 떠나 있었지만 어릴 적 뛰어놀던 골목, 시냇가, 길모퉁이의 추억은 원형대로 살아 있어요. 이런 추억과 감상들을 시로 끄집어내기로 한 거죠."
시인이 화두로 삼고 있는 '대구시지'는 이번 호까지 모두 7집까지 나왔다. 앞으로 10집까지 펴낼 예정이다. 1집은 대구의 서정(抒情), 2집은 장터 풍물, 3집은 대구의 음식과 명소, 4집은 대구 인물, 5집은 경상도 사투리의 속살, 6집은 대구의 사찰, 재실, 서원, 문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앞으로 8집에 신(新)대구 십경(十景), 9집에 민속 세시풍속, 10집에 팔공산을 비롯한 산과 강이 담기면 저자의 '대서사시'는 막을 내린다.
◆4부에 걸쳐 대구 향토사 복원='올개 국민학교 3학년짜리/ 순돌이란 늠이 학교에 갈라꼬 책가방을 챙기다가/ 무망간에 지 에미한테 쫓아가서/ 에미 목덜미를 부둥키 안고는 엄마 내 젖좀 도고/ 칸다/ 어미가 하도 얼치거이가 없어서….(중략)
'점점 어물어진다'로 시작하는 시집은 모두 4부 100편으로 구성됐다. 1부 '경상도 사투리의 속살'에서는 토속 방언의 진수를 보여준다. '비 맞은 중 맹쿠로 구시렁거리 쌓는다' '입덧 빌나기 하는 년 치고 아들 놓는 년 못봤다'처럼 다소 거친 사투리들이 여과 없이 퍼부어진다. 전통시대 시정(市井)에서 통용되던 말이지만 시로 옮겨지면서 연로한 독자들에겐 향수로, 젊은 독자들에겐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정제되지 않은 사투리 원형이 쏟아지는가 하면 '비리닉닉하다' '껄찌이 묵는다'처럼 밑에 주석을 봐야 해독이 가능한 사투리들도 있다.
저자는 "대구의 사투리는 의성(擬聲), 의태(擬態)의 표현이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 층(層)이 많아 표현이 매우 정교하다"며 "어떤 시에서는 절제된 사투리 시어 한두 개로도 어린 시절을 그대로 복원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2부는 대구지역의 '전설'을 다룬다. 주로 '한국구비문학대계'에서 소개된 지역의 일화를 싣고 있다. '홑어미 위해 놓은 징검다리' '못된 시에미 질딜인 거신 미느리' 등은 모두 '대구의 전설과 설화'에 원문으로 전하는 이야기들이다. 이 전설들은 시인의 필력을 입어 '조청처럼 찐득하고 농익은 경상도 사투리' 버전으로 다시 태어난다.
'고려 태조 왕건 설화'를 다룬 3부는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패한 왕건의 도주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패주(敗走) 동선을 따라 벌어졌던 일화들이 재미있게 펼쳐진다.
역사 이야기에 접어들면서 난무하던 사투리는 어느 순간 사라진다. 대신 시인의 문체는 진지 모드로 변한다. 역사 사실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4부는 '대구의 성곽, 역참, 봉수'에 대해 다룬다. 첫 장에 지역의 성터, 역(驛), 봉화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지역 문단에서도 시인의 작업을 '모어'(母語)로 읽는 연작 장시(長詩)로 표현하며, 대구의 인문, 지리, 풍물을 고향의 언어로 맛깔나게 풀어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저자는 후기 '시어(詩語)와 임계속도'에서 자신의 시작(詩作)을 '임계속도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작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자신의 모든 대구 역사 지식, 인문학 지식, 풍물 지식을 활주로로 끌고 나와 임계속도를 넘겨 마하(Mach)의 영역으로 비행하겠다는 것이다.
그때쯤 대구도 호머의 대서사시는 아니더라도 전집(全集) 역사시집을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31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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