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18년 제4회 시니어 문학상 대상-논픽션]뒤로의 여행③

내 차례였다. 엄마의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할머니는 나의 왼쪽 다리를 몇 번 움직여보시곤 내 머리를 당겨 손가락 뼘을 재가며 머리 위에 지구본을 그리듯 둥글게 침을 놓았다. 침을 찌르곤 침 머리를 비볐지만 겁먹은 것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머리에서 시작한 침은 목, 허벅지, 무릎, 복사뼈 순으로 관절 부분에 원을 그리며 침을 놓았다. 그리곤 발등에 두 개의 침을 꽂아두고 발가락 사이사이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넷째 발가락과 새끼발가락 사이에 침을 찌르는 순간 아픈 통증에 나도 모르게 왼쪽 다리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주위 사람들 감탄의 소리가 터지고 할머니가 활짝 웃으시며 나를 놀리셨다.

"네 이놈 쌀 한 섬 지고 와야 한다."

일러스트 전숙경
일러스트 전숙경

할머니는 엄마에게 당부하셨다. 기가 통했지만 육 개월은 매일 침을 맞아야 한다고, 열흘이 지나자 지팡이에 의지 혼자 침을 맞으러 갈 수 있었다. 침을 맞기 시작 한지 삼 개월이 지나자 나는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는 세월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았다. 높이뛰기를 할 때나 돌다리를 건널 때는 오른발보다 왼발이 한 뼘 이상 거리가 부족했다. 다리 위나 좁은 길을 걸을 땐 왼발의 중심이 불안해 휘청거릴 때가 많았다. 정강이 굵기도 왼쪽이 확연히 작았다. 인체의 세포는 칠 년마다 재생된다고 하지만 성장기인 열네 살 때 약 20일간 왼쪽 다리를 움직이지 못한 나는 기능에서 평생 큰 차이를 안고 살아야만 했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회생한 난 철없이 지내다 어른이 되자 마음 한구석이 늘 무거웠다. 한평생을 살아가려면 누군가와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이 공동체 사회라지만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을 오랫동안 알지도 못하고 있다는 건 마음의 짐이었다. 신문방송에서 사람의 생명에 대한 극적인 일들을 읽고 들을 때마다 나는 떠 올렸다. 피를 흘리며 길에 쓰려져 있는 나를 누구도 섣불리 구원의 행동에 나서지 못할 때 군복에 피를 흥건히 적시며 나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그 군인은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앉은뱅이에서 나를 이렇게 걸을 수 있게 해준 할머니의 얼굴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건 이유 불문 부끄러운 일이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른 며칠 후 유품을 정리하는 날 종일 봄비가 질척거렸다. 유품을 정리하다 어머니 속곳 주머니 두 곳에서 육만 삼천 원이 나왔다. 먹먹함에 허공을 올려다보는데 어머니 속곳에 관한 추억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어머니는 명절 때 손주들의 세배 자리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곤 했다. 속곳 주머니에서 꺼낸 꼬깃꼬깃 꾸겨진 돈을 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언제가 한 번은 미리 봉투를 만들어 드렸는데도 자기 돈을 줘야 잘 산다며 세배를 끝낸 손주들을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게 했다. 속곳 주머니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은 남달랐다.

어머니는 예외 없이 속곳에 주머니를 달았다. 주머니는 특색이 있었다. 속곳과 색상이 다르고 주머니 입구를 좁게 만들어 엄지와 검지를 이용하지 않으면 빠져나오지 못하는 구조였다. 속곳을 갈아입는 걸 본 적이 있다. 먼저 입고 있는 속곳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갈아입을 속곳 주머니에 돈을 넣고 나서야 옷을 갈아입으셨다. 속곳을 보자기에 싸며 깨달았다. 홀로 어린 사 남매를 키우며 받은 돈의 서러움을 속곳 주머니에 넣고 삭히고 삭힌 걸,……

그날 이후 나는 봄비가 내리는 밤이면 어머니 생각에 베개 뒤척이는 날이 많아졌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빗줄기로 창 두드리며 나무라시는 것 같았다. '어제는 지나간 나의 일이니, 오늘 너의 숙제나 잘하라고.'

뒤로의 여행도 반환점을 돌아 나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3년이었다. 막냇동생이 대학에 가고 싶어 했다. 어머니의 능력으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결론은 등록금은 내가 마련하기로 하고, 생활비는 동생이 아르바이트로 충당하기로 했다.

동생이 인천에 있는 모 대학에 입학했다. 한 학기를 마치고 나를 찾아왔다. 형색에서 고생의 티가 역력했다. 방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마음이 아팠다. 직장동료 두 사람에게서 돈을 빌려 등록금을 손에 쥐여 주며 힘주어 말했다.

"학비는 걱정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라." 나는 축 처진 동생의 어깨를 부추겨 주려고 허세를 부렸지만, 마음의 짐은 무거웠다. 어떻게 하면 매달 몇 푼이라도 저축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굴렸다.

때마침 모 일간지에 제목이 '맑은 샘물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월간 문예지에서 개인 대리점을 모집하는 광고에 눈이 갔다. 먼저 직원 중에서 구독자를 생각했다. 직원이 사십 명 정도였는데 숫자가 매일 매일 늘어났다. 어제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안 되리라 판단했지만, 오늘은 억지 논리를 만들어 가상 구독자를 만들다 보니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이십오 권은 충분히 소모하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첫 달이라 보수적으로 숫자를 조정 이십 권을 신청했다. 책이 도착했다. 책을 신청할 때의 마음과는 달리 막상 직원들에게 구독을 요청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권하면 이유 불문 구독을 신청하고 적극적으로 책을 홍보해주리라 믿었던 동료의 말은 의외였다.

"이런 책 아무도 안 본다." 그 말은 겨우겨우 나를 떠받치고 있던 용기의 지게 지팡이를 쑥 빼버리는 것 같았다. 보름이 넘도록 나는 열 명을 채우지 못했다. 나는 동생과 생각나는 친구와 친척들에게 우편으로 책을 보냈다. 그러나 앞으로가 더 문제였다. 최소한 육 개월은 책을 공급받기로 우편으로 약속이 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부업으로 돈을 벌어 보겠다는 내 생각은 적자를 볼 수밖에 없었다.

육 개월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동생의 편지를 받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봉투를 뜯었다. 자신이 등록금 마련을 위해 여러 가지 잡부 일을 가리지 않고 해보았으나 어려웠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밤잠을 설치며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다 문득 묘안이 떠올랐다. 아내의 패물을 전당포에 맡기기로 했다.

때마침 집사람이 친정에 가고 없었다. 서랍을 열었다. 결혼 때 해준 금반지와 금목걸이가 전부였다. 우리 집 유일의 유동자산인 금붙이를 작은 보자기에 쌌다. 지역이 면 소재지라 혹시 전당포 골목 앞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전당포 인근 큰길에서 잠시 사방을 살펴보고 빠른 걸음으로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하리라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전당포라는 붉은 글씨의 간판 위에 켜진 백열등 불빛은 내 발등까지 훤히 비추었다. 전당포의 창문은 특이했다. 콘크리트 집 벽에 작은 봉창 같은 구멍을 뚫어 그곳에 유리문을 달아 밖에선 안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안에선 밖을 확인할 수 있는 구조였다. 손바닥만 한 창문이 열리고 마중 나온 손에 보자기를 건넸다. 안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이자는 얼마이며, 나누어 갚는 것은 안 되고, 만 육 개월이 지나면 찾지를 못한다."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마음이 바빠 빨리 돈을 내주기를 바랐다. 골목을 뛰쳐나오며 입술을 깨물었다. '기간 내에 꼭 금붙이를 찾아 아내 몰래 제자리에 가져다 놓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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