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경북여고 여학생의 일기

하응백 문학평론가

하응백 문학평론가
하응백 문학평론가

여학생의 일기하면 '안네의 일기'가 떠오른다. 나치 점령 당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은신처에서 숨어 지냈던 유대인 안네가 약 2년 동안 기록한 일기다. 은신처가 발견되어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간 안네는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3월경, 장티푸스에 걸려 16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안네의 일기'는 2차 대전이 끝나고 전 세계로 번역되어, 전체주의의 폭압과 인간의 자유를 환기하는 교과서 구실을 했다. 그녀는 일기에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라고 썼다.

폭압의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한국판 '여학생의 일기'도 있다. 일본 동지사대학의 오타 오사무 교수는 2007년 서울의 한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대구의 한 여학생의 일기를, 2013년 '식민지 조선의 일상을 묻다'라는 책자를 발간하면서 소개했다. 대구교육박물관에서는 개관기념으로 일본어로 되어 있는 이 일기를, '여학생의 일기'란 이름으로 지난 6월 번역 발간했다.

'소심'이라는 이름의 이 여고생은 경북여고의 전신인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당시 이 학교는 4년제였다. 일기를 보면 이 여학생은 4학년 학생으로 졸업 후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기가 작성되던 1937년은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던 바로 그 해. 대구의 여학교에서도 일제는 전시동원 체제를 가동하고 황국식민화를 위해 여학생까지 총력으로 동원하고 있었음을 일기는 증언하고 있다.

"오늘 가사 시간에 재봉을 했습니다. 추위가 다가오는 중국에서 싸우는 용사는 여름옷 한 벌 뿐이니 경북의 위문품으로 조끼를 드리고자 해서 그 재단을 했습니다."(10월 9일)

"우리들이 노력해서 바느질한 끝에 벌써 512벌의 조끼를 완성했습니다."(10월 16일)

당시의 조선 여학생까지 군수물자 조달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봉사라 이름하여, 일본인 교장과 담임은 수시로 여학생들을 독려하고 채근했다. 일인당 10전씩 돈(애금헌금)을 거두어 군용 장갑을 제작하게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황국신민의 서사, 전우의 노래와 일본 육군가를 외우게 하고, 각종 일제 관용 행사에 학생들을 수시로 동원했다.

반장이었던 이 여학생은 선생님들의 말을 적극 수용하고 애국하려고 노력했다. 바로 그것이 지금의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안네는 비록 쪽방에 갇혀 있기는 했지만 자유로운 상상으로 일기를 썼다. 하지만 이 여학생은 일기마저 일본인 선생에게 검사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였다. 담임은 일기에 도장을 찍어주고 격려의 코멘트를 달았다.

일제의 검열 혹은 사상통제는 작가나 지식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이 일기는 전 교육기관을 통해 전체 조선인의 정신을 통제하려 했던, 일제의 치밀한 사상통제에 대한 기장 기초적이면서도 명백한 증거자료라고 할 수 있다. 후배가 말을 안 들어 속상해 하기도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시험을 망쳤다고 허탈해 하기도 하는 이 여학생의 1937년 12월 8일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황군의 그 아픈 몸, 괴로움, 힘듦에 동정하는 마음이 일어나며, 함께 남경 함락을 기뻐했습니다."

그로부터 5일후, 일본군이 난징에서 대학살을 자행된 것을 역사는 또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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