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국제 핵비확산 체제와 북핵문제

장동희 경북대 초빙교수, 전 주 핀란드 대사
장동희 경북대 초빙교수, 전 주 핀란드 대사

1985년 '핵비확산조약' 가입한 북
1993년 탈퇴로 1차 북핵 위기 발생
'비핵화' 약속 깨고 6차례 핵실험
미북 싱가포르 성명 큰 의미 없어

"1945년 7월 16일 새벽 5시 30분,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공군기지 먼 외곽지역에서 최초로 완전한 규모의 핵분열 폭탄 폭발 실험을 실시하였음. 방출된 에너지는 보수적으로 잡아도 TNT 1만5천t 내지 2만t 이상으로 추산됨."

처칠 총리 등 연합국 수뇌부와 일본의 전후 처리문제 논의를 위하여 포츠담에 체류 중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최초의 핵무기 탄생을 보고하는 전문이다. 이어 소련(1949), 영국(1952), 프랑스(1960), 중국(1964)까지 핵실험에 성공하는 가운데,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는 핵 확산 차단 필요성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1953년 12월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평화를 위한 핵'(Atoms for Peace) 제하 유엔총회 연설을 통하여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권리를 제창한다. '핵비확산' 의무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권리를 양 축으로 하는 핵비확산 체제의 기본 골격이 제시된 것이다. 1959년 아일랜드의 유엔총회 결의안 제출을 시발점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핵비확산조약(NPT)은 1968년 6월 12일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후 1970년 3월 5일 발효된다.

NPT는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실험에 성공한 위 5개국만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그 외 국가는 핵무기를 제조하거나 획득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NPT 신규 가입국은 가입 후 18개월 이내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안전조치협정(Safeguards Agreement)을 체결, IAEA에 사찰 권한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1985년 NPT에 가입한 북한은 1992년 4월이 되어서야 IAEA와 안전조치협정을 체결한다. 이 협정에 따라 북한이 제출한 핵 관련 신고서가 사찰 결과와 일치하지 않음을 발견한 IAEA가 이의 규명을 위한 특별사찰을 요구하고, 북한이 이에 반발, 1993년 3월 NPT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한다.

카터 전 미 대통령의 중재로 1차 위기를 극복하고, 미북 간에 합의를 본 것이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다. 제네바 합의에서 미측은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하고, 북한은 모든 핵시설 동결과 궁극적 철거, 사용 후 핵연료봉 8천 개 모두 해외반출, IAEA 특별사찰을 통한 검증을 약속한다. 그러나 이 제네바 합의는 2002년 비밀 농축우라늄 시설이 발각됨으로써 파기된다.

2005년 9월 19일 채택된 6자 회담 공동성명은 북한의 모든 핵프로그램 폐기와 '검증 가능한 한반도 비핵화'를 규정하고 있다. 후속 합의에서 북한은 모든 핵프로그램의 완전하고 정확한 공표 및 2007년 12월 31일까지 모든 핵시설의 불능화를 약속한다. 그러나 이 합의도 검증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대포동 2호 발사, 북한의 2차에 걸친 핵실험으로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북한은 2012년 2월 미국의 식량원조 대가로 IAEA 사찰관 감시하 영변 우라늄 농축 가동 중단과 중장거리 미사일 실험 유예를 약속한다. 그러나 이 약속 또한 두 달 후인 4월 13일 은하 3호 발사로 무위로 끝난다. 이에 앞서 남북한은 1992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합의한 바 있다. 이 합의는 핵통제공동위원회 설치와 상호 사찰까지 규정하였으나, 사찰 대상과 방법을 둘러싼 이견으로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사실상 휴지 조각이 되고 만다.

결국, 북한과의 핵 협상 역사는 북한의 살라미 전술과 약속 불이행으로 점철되어 있다. 4·27 판문점 선언이나 싱가포르 미북 공동성명에서 북한이 약속했다는 '완전한 한반도 비핵화'란 문구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이유다.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이래 누대에 걸친 선대의 유훈이라고 주장하며 6차에 걸친 핵실험을 감행한 북한이다.

약력:장동희 경북대 초빙교수, 전 주 핀란드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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