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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산책] 부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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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광 동화작가

김일광 동화작가
김일광 동화작가

이른 아침에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 집 에어컨이 고장인데 수리 기사가 일주일 뒤에나 올 수 있단다. 그간 어머니를 에어컨 있는 집으로 모시자고 했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침 시간 급한 일을 서둘렀다.

불볕더위가 이어지면서 애프터서비스(AS) 요청이 폭주한다지만 일주일을 기다리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구나 설치한 지 겨우 2년 된 제품이 고장이라니 슬그머니 화가 났다.

오전 11시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찜통이었다. 승용차까지 가는 사이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어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머니가 벌써 인기척을 느끼고 마루로 나오셨다.

에어컨 고칠 동안 우리 집으로 가자는 말을 꺼냈다. 내 말에 어머니는 오히려 의아한 얼굴을 하셨다. 무슨 소리냐고 선풍기도 없이 이보다 더 더운 시절을 지내왔다면서 고개를 저으셨다. 그래도 이번 더위는 예전보다 더우며, 오래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선풍기가 두 대나 있는데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웃으셨다. 그러고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뙤약볕 아래에서 밭을 매던 이야기며, 해 어스름에 돌아와서는 마당에 멍석을 내놓고 매운 모깃불 곁에서 저녁을 먹던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다. 하루 종일 밭 자락에 버티시다가 돌아와서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가족들 저녁을 챙기시느라 더위를 더위로 느낄 새도 없었단다. 그때도 더위는 마찬가지였지만 가족이 부채 바람 하나로 너끈히 더위를 쫓을 수 있었다고 하셨다. 특히 우리 집에는 호박 농사를 많이 지어서 여름 내내 호박죽을 먹어야 했다. 우리 형제는 식은 호박죽을 좋아했다. 어머니는 호박죽 한 그릇을 남겨서 뒤뜰 장독 위에 얹어 두셨다.

우리 형제들은 둠벙에서 목물로 더위를 쫓고 와서는 장독에 얹힌 호박죽을 밤참으로 먹곤 했다. 어머니는 이튿날 아침, 비워진 그릇을 보는 게 그렇게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여름이면 그 생각으로 더위를 쫓는다고 하셨다.

에어컨 고장으로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러 갔다가 오히려 어머니가 차려 주시는 점심을 먹고 오랜만에 옛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된 나는 어머니에게 한 번 더 졸랐다. 그러면서 수리기사의 늑장을 짜증스럽게 나무랐다. 어머니가 나를 보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너무 나무라지 마라, 이 더운 날 이집 저집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겠냐. 그 사람도 누구네 집 자식일 텐데."

어머니의 그 말씀 끝에 예전 그 부채 바람이 지나갔다. 더위가 더위로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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