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1 정신 대구경북의 '얼'<10>-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는 3·1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만주로 향해 여성 교육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에 앞장섰다. 이후 의열투쟁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에 나섰다. 사진은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 있는 남 지사의 생가항일 기념비. 영양군 제공
남자현 지사는 3·1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만주로 향해 여성 교육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에 앞장섰다. 이후 의열투쟁으로 조국의 독립운동에 나섰다. 사진은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 있는 남 지사의 생가항일 기념비. 영양군 제공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 구국항쟁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특히, 여성들은 독립과 항일의 험로에 남편과 자식을 떠나보내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떨쳐 일어나 곳곳에서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3·1만세운동 대열에도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참가했고, 그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 활약상들이 전해오고 있다.

국가보훈처에서 훈장과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 4천329명이다. 이 가운데 여성은 전체의 1.9%인 272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나라를 잃은 슬픔은 남자나 여자나 똑같다'는 신념 아래 우리 선조의 독립운동에는 남녀 구분이 없었다.

남자현 지사
남자현 지사

◆남자현, 만주 여성교육회 조직 독립·여성계몽·무토 살해 모의

영화 '암살' 속 전지현이 열연한 인물은 가공이 아닌 실재 인물이었다.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출신의 남자현(1872~1933)이 그 주인공이다.

1896년 의병항쟁에 나섰던 남편 김영주가 전사하고 유복자와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평범한 여인들처럼 지내왔던 남자현이 독립에 뛰어든 것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본격화 된다.

남자현은 46세가 되던 1919년 2월 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3·1독립선언에 참여했다. 열흘 남짓 서울에서 활동하다 3월 9일 만주로 향했다. 만주에서 그는 12곳에 교회를 건립하고 10개의 여성 교육회를 조직해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에 힘썼다.

그녀의 이름이 만주지역 독립운동사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27년에 일어난 길림사건 때다. 남자현은 당시 안창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계 지도자 47명이 중국 관헌에 검거되자 독립운동가들이 풀려날 수 있게 지대한 공을 세웠다.

길림사건 뒤 남자현의 활동은 큰 변화를 보였다. 교육활동에서 의열투쟁으로 전환했다. 실제로 남자현은 사이토오 총독을 암살하고자 권총 한 자루와 탄환 8발을 받아 서울을 찾기도 했다.

1932년 3월 1일 만주가 완전히 일본 손에 넘어가자 남자현은 국제사회에 독립의 뜻을 알리고자 혈서를 전달계획을 세웠다. 하얼빈 남강에 있던 한 중국인 음식점에서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 이란 다섯 글자를 썼다.

독립을 원하는 우리 민족의 뜻을 붉은 피로 쓴 것이다. 그리고 잘린 손가락을 함께 싸서 국제연맹조사단에게 전달하고자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이 사건 뒤 남자현은 만주에 파견된 일본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만주국 수립 1주년 행사가 열리는 1933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잡아 준비했지만, 밀정의 밀고로 거사 직전인 2월 27일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됐다.

남자현은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 형무소에서 여섯 달 동안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당시 그녀는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항거하자는 결단을 내리고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남자현은 음식을 끊은 지 9일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형무소를 나온 남자현은 한 여관에서 아들과 여러 동지의 간호를 받다가 끝내 숨지고 말았다. 그녀는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혼수상태로 풀려난 지 닷새만인 1933년 8월 22일 남자현은 만 60세로 순국했다.

김락은 시아버지와 남편, 자식 등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을 지켜오다가 많은 나이에 자신도 3·1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옥고를 치루면서 고문으로 실명했던 대표적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사진은 시댁인 향산고택. 안동시 제공
김락은 시아버지와 남편, 자식 등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을 지켜오다가 많은 나이에 자신도 3·1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옥고를 치루면서 고문으로 실명했던 대표적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사진은 시댁인 향산고택. 안동시 제공

◆김락, 시아버지·남편·아들·친정 오빠 뒤따라 자신도 독립운동에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지만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던 여인 김락(1862~1929).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일제가 기록한 '고등경찰요사'에 독립운동가 이동흠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네 줄의 글이 단서가 됐다.

이동흠은 파리장서사건의 핵심인물인 이중업의 아들이자 국권 피탈에 슬퍼하며 단식 끝에 순국한 향산 이만도의 손자다. 김대락의 막내 여동생으로 밝혀진 김락은 독립운동가 3대를 지켜낸 중심인물이자 자신도 3·1운동에 뛰어든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열다섯에 이중업의 아내이자 이만도의 맏며느리가 된 김락은 시집온 지 얼마되지 않아 시어머니를 여의고 종부의 삶을 살게 됐다. 이때 시아버지는 예안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됐고 남편도 위험한 길을 함께 따라나섰다. 하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집안을 지키며 이들을 뒷바라지했다.

일제의 국권강탈이 이뤄진 1910년 시아버지가 곡기를 끊고 자정순국을 택함으로써 가문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렸다. 아버지처럼 여기던 큰오빠 김대락은 지역 청년들에게 신문학과 독립정신을 가르치다 일제의 탄압으로 만주로 망명했다. 이 와중에도 김락은 묵묵히 남편과 두 아들의 독립운동을 살뜰히 보살폈다.

3·1운동이 전국으로 번져나간 1919년 3월 23일, 김락은 적지 않은 나이에도 안동면의 3차 만세시위에 직접 나섰고 일본군 수비대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아 두 눈을 잃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57세 였다.

이후 남편은 낯선 땅에서 목숨을 잃었고 두 아들은 옥살이를 치렀다. 맏사위는 조선 최고의 파락호 김용환(1887~1946)이어서 시집간 딸의 마음고생은 고스란히 그녀의 근심이 됐다. 훗날 김용환이 노름으로 탕진한 막대한 재산이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감당해야 할 혹독한 운명은 그렇게 대물림됐다.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29년 추운 겨울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봉선 교사
임봉선 교사

◆임봉선, 대구 여학생 만세시위 이끌고 26세 꽃다운 나이에 순국

대구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서문밖 큰 장에서 일어났다. 학생들이 주도했던 이날의 만세운동에는 대구고등보통학교와 계성학교 등 남학생들을 물론 신명학교 여학생 50여 명도 참가했다. 이 여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이가 신명학교 교사였던 임봉선(1897~1923)이다.

임봉선은 만세운동이 있기 한해 전인 1918년 22세의 나이로 신명학교에 초임교사로 임용됐다. 서울과 평양에서 일어났던 3·1 만세운동에서 여성의 활약상을 전해 듣고는 적극 참여하기로 하고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거사가 있었던 3월 8일 장날에 학생들은 동산 언덕에서 내려와 큰 장 초입에서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학생들 뒤로는 일반시민과 장꾼 수천 명이 동참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큰 장에서 시작된 대열은 동산교, 대구경찰서, 경정통(현 종로), 남성정(현 약전골목), 중앙파출소를 거쳐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앞까지 도달했다. 시위 행렬이 달성군청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은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대기 중이었다. 놀란 시위 행렬은 멈출 수밖에 없었고 이 틈을 타 일경과 헌병, 군인들이 시위대열로 뛰어들어 무자비하게 군중을 무력 진압했다.

임봉선과 신명학교 여학생들도 이때 대부분 체포됐다. 다행히 여학생들은 나이가 어린 소녀라는 점이 참작돼 석방됐지만, 졸업생이나 교사들은 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았다. 임봉선도 보안법 위반을 명목으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임봉선은 모진 옥고를 치르고 나와 그 후유증으로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국가는 이러한 임봉선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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