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엔 가족이랑 나들이나 갈까 해요."
퇴계 이황 17대 종손의 한마디가 추석 연휴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다. 포털사이트에는 '퇴계 이황 차례', '이황 제사' 등의 검색어가 인기를 끌었다. '명절노동'에 시달리던 여성들에게는 복음이었다. 차례를 지내는 집안들은 허례허식(虛禮虛飾)을 반성하는 기회가 됐다. 물론 관습을 고집하는 가부장적 사람들은 불편했을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이황 선생의 17대 종손 이치억(42) 성균관대 유교철학·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 이 연구원은 추석 전 한 신문 인터뷰에서 명절 문화에 대해 돌직구를 날렸다. 그는 "추석을 어떻게 보내느냐고요? 아버지 모시고 가족들이랑 근교로 나들이나 갈까 해요"라고 했다. 내로라하는 가문의 종손이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고 놀러 간다니. 눈과 귀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사람들은 유교철학을 전공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연구원은 '예(禮)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믿는 제사도 조선시대 어느 시점에 정형화된 것인데, 그게 원형이라며 따를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유교에서는 원래 명절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후기 너도나도 양반임을 내세우면서 차례상이 제사상 이상으로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일부 유림들은 "명절 차례는 말 그대로 차(茶)나 술을 올리면서 드리는 간단한 예(禮)를 뜻한다. 이를 기제사상과 혼동해 거나하게 차려내는 관습과 과시욕이 명절의 참된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고 했다. 또 '명절노동'을 여성에게만 시키거나 제사에 여성을 참여시키지 않는 세태를 꼬집었다.
명절은 즐거워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지만 않다. 가부장적 명절 문화 탓이다. 여성들은 불평등한 명절노동과 소외로 상처 입고 있다. 갈등과 불화가 생기기도 한다. 명절증후군은 여성 질환으로 의학교과서에 등재될 판이다. '찌짐 굽다가 이혼한다'는 말은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속도는 느리지만 명절 문화에 변화가 일고 있다. 이대로 뒀다가는 명절이 외면받을 것이란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어른들이 통 큰 결단을 내리고 있다. 자식들에게 음식 수를 줄이거나 차례 음식을 주문하자고 한다.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고 성묘로 대체하는 집들도 늘고 있다. 추석 전 한 온라인 쇼핑업체가 30, 40대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응답이 38.8%였다.
추석 연휴 친척·친구 10여 명에게 전화로 명절 안부를 물었다. 대부분 차례 간소화가 추석 화제였다고 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형님이 퇴계 종손 관련 기사로 '모두발언'을 했다. 형수님과 아내, 조카들까지 거들었다. '명절에 가족여행을 하는 집들이 많다' '성묘로 차례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갈비찜, 프라이드 치킨 같은 음식들로 차례상을 차렸으면 좋겠다' 등등. 말없이 지켜보시던 32년생 어머니도 '형편에 따라 하면 된다'고 암묵적 동의를 하셨다.
세상과 소통하지 않는 예법은 살아남기 어렵다. 예법보다는 사람이 먼저다. 내년 설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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