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남도에서 상경한 동무와 실랑이를 벌인 적이 있다. 친구는 조선시대는 전라도 말이 표준어였다는 논리를 폈다. 경상도 짝꿍과 함께 단번에 '머라카노'로 응수했다. '경상도' 사투리가 임금이 사용하는 언어였다고 큰소리쳤다.
골치 아픈 상소가 거듭 있으면 "제발 쫌(그만 좀 하시오)"이라 했으며 중전에게는 "밥 뭇나, 아는, 자자"라고 속삭였다고 우겼다. 부부싸움이라도 할라치면 "가스나, 자꾸 이 칼래, 치아라 고마"로 꼰대 남편임을 스스로 자임했다는 억지도 곁들였다. 어쨌거나 지방에서 올라온 서울 새내기들의 사투리 자존심이 벌인 일화로 기억된다.
경상도 사투리가 전국에서 먹힐 때가 있었다. 경상도 말을 쓰면 사윗감으로 80점은 먹고 들어간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수십 년간 TK(대구경북) 정권을 가지면서 국가 요직 등은 TK 인사들이 꿰찼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요즘은 경상도 조폭들의 걸걸한 사투리도 스크린에 걸리고 전파를 탄다. 말의 흥망성쇠는 곧 그 지역의 부침과도 연관이 있다는 점을 실감케 한다.
라틴어(교황청 공용어)는 현대의 영어에 필적할 정도로 번성했다. 현재는 교황청 바티칸의 언어로 통하며 극히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규칙이 많고 외울 게 많아 언어의 경제성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틴어는 여전히 품격 높은 언어로 인정받고 있다. 다양한 격 변화가 철저한 규칙 속에 이뤄지는 까닭에 '신의 말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언어'란 찬사가 붙는다.
언어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소쉬르는 '언어 가치'(linguistic value)란 개념을 설파했다. 각 낱말의 대립에 의해 낱말의 언어 가치가 보장된다고 봤다. 화폐에 비유하자면 10원짜리 동전은 100원짜리나 5원짜리 같이 높거나 낮은 동전과 대비된 위치에 의해 가치를 지닌다.
이는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사투리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것과 맥락을 함께 한다. 이 지사는 "경상도 사람은 진짜 뛰어나다. 사투리도 잘 쓰고 표준말도 잘 알아 듣는다"는 농담을 자주한다. 지난 경북도 국정감사 때는 일부러 사투리를 섞어 쓰기도 했다. 그만큼 경상도 말의 가치를 올리려 노력한다. 잃어버린 경북을 되찾겠다는 투지(?)가 말에 녹아 있다.
말이 행동을 규정한다는 소쉬르의 주장처럼 사투리로 투영된 경북의 기질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여는 데 일조했다고도 할 수 있다. 경북은 한반도에서 처음 통일국가(신라)를 세웠고,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새마을 운동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경북의 위상이 현재보다 더 추락한다면 '우리 사투리'가 품격을 깎아먹는 말로 치부될 수 있다. 나라가 흥해야 말이 흥하기 때문이다. 사투리가 쇠퇴할수록 우리의 기질도 잃게 된다.
하지만 라틴어처럼 도백은 도백답게, 도민은 도민답게 각자 주어진 역할에 맞게 행동한다면 경상도 말은 품격 높은 언어로 경북 기질을 계승하지 않을까. 나아가 대통령도, 민정수석도, 대법관도, 광주시장도, '~답게'를 할 때 대한민국의 격도 저절로 올라갈 것이다. 사투리의 품격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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