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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제4회 시니어 문학상 논픽션부문 당선작]⑥노병의 증언/ 김길영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사람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포로는 계급이 따로 없었으므로 누구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포로 몇 명은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모포로 가리고, 먹다만 식은 밥이며 김치를 넣고 끓여서 한 입씩 번갈아 허기를 면했다. 다른 포로들 중에는 불빛 간수를 잘 못하여 중공군 감시병으로부터 혼쭐나게 벌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뺀찌 라일라! 뺀찌 라일라! 뺀찌 라일라! 화 부싱화"(확실한 중국말인지 모른다. 귀에 들린 대로 기억된 발음이다.) 즉 비행기가 날아온다. 불 피우지 말라고 야단치는 것 같았다.

▶탈출시도

신포리를 거쳐 지촌마을에 도착하여 하루 낮을 보냈다. 이 지역 오른쪽은 화천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김화로 가는 길목이다. 더 이상 북쪽으로 가게 되면, 전선을 뚫고 남쪽을 향하여 탈출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몇몇 포로들이 굳은 결심을 했다. 끌려가 죽음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탈출을 시도해 보자고 했다. 고향 친구 김구환. 박준영. 곽원영. 이종환. 경기도 시흥이 고향이라는 전우 두 명, 그리고 나. 일곱 명이 탈출을 결행하기로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임무를 주어 감시병들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보름달이 지고 며칠이 지났다.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두웠고 금방 함박눈이라도 내릴 것 같았다. 중공군 감시병을 예의 주시하던 누군가가 차례차례 귀띔을 돌렸다. 중공군 감시병들이 잡담하며 한눈팔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하나 둘씩 수신호를 주고받으며 도로 지하 직경 1미터 되는 콘크리트 하수구 속으로 은신하는데 성공했다. 20 여분 지나 포로 대열이 모두 떠난 후, 옆 산자락으로 피신했다. 눈이 덮이고 잡목이 우거진 능선을 따라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거기서부터 한 시간에 1킬로미터씩, 4시간 정도 걸어서 산마루를 넘을 무렵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눈을 헤치고 가랑잎을 모아 그 속에 몸을 숨기고 하루 낮을 보냈다. 밤이 되어서야 달과 별을 보고 방향을 측정했다. 국군의 포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남하를 시도 했다. 3일을 굶었다. 눈뭉치로 목을 축이며 춘천소양강변에 도착하자 탈출계획을 수정했다. 이 지역은 중공군이 주둔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소양강을 건너기로 했다. 수심이 얕은 곳은 얼어 있었지만, 수심이 깊은 곳은 얼지 않아 물이 흘렀다. 우리는 두 조로 나누어 인민군 검문소 150미터 강 하류에서 도강渡江에 성공했다. 하체가 모두 젖어 몸이 꽁꽁 얼기 시작했다. 움직여야 산다는 각오로 걷고 또 뛰었다. 전에 우리가 9중대 CP로 사용하던 집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그 집은 폭격을 맞아 집 한쪽 모퉁이가 부서져 있었고, 주인이 피난가면서 비장해둔 쌀과 감자 김치가 모두 털린 상태였다. 다행히 이곳저곳 뒤져 나온 약간의 곡식과 감자 몇 개도 찾았다. 불을 지펴 옷을 말리고 헌 소쿠리와 폭격에 부서진 문살에 불을 지폈다. 모처럼 뜨뜻한 밥에 된장국으로 식사 한기를 매웠다. 우리 일행 일곱 명은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 1차 탈출과 실패

이틀간 9중대 CP로 사용했던 민가 마루 밑에서 이불솜을 깔고 쉴 수 있었다. 이불솜만으론 체온을 유지할 수 없어 서로 껴안았다. 그래도 밤은 깊고 추웠다. 전쟁터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부모님과 아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내일 우리들에게 어떤 운명으로 다가올지는 상관이 없는듯했다. 사지死地를 간신히 벗어나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목숨을 가지고 중국 고사도 떠올려 보았다. 정량의 옥퉁소 소리가 귓속에서 적막을 흔들며 앵앵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존재는 포로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 아군의 진지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들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빌면서 졸음이 왔다.

51년 3월 1일. 국군의 복장으론 신분 노출이 쉬었다. 인민군 방한복 비슷한 차림으로 변장했다. 해방 전사라는 신분으로 통일하기 위해 낡은 방한복으로 비무장을 하고보니 밤에는 중공군, 낮에는 인민군 복장과 비슷했다. 중공군은 보급품을 마차로 이동했다. 야간에는 보급품을 실은 마차 뒤에 따라갔다. 우리의 신분을 숨기는 데는 별 탈이 없었다. 주간에는 외진 곳에 있다가 야간에만 행동했다. 밤 9시경 중공군이 보급품을 싣고 홍천에서 삼마치고개를 넘으려는 뒤에 바싹 붙어 갔다. 고개 밑 분지에서 중공군 기마병 1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우리는 위협을 느끼고 불안했다. 그러나 보급품을 실은 마차는 고개 정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도 따라 올라갔다. 횡성 방향 먼 산을 바라보았다. 최전방에서 신호탄이 올라가고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차는 고갯길을 내려가다 우측 길로 가고 있었지만 우리 일행은 그 마차를 계속 따라갈 수 없었다. 도로 양 수로에 긴급히 몸을 숨겼다. 중공군 주저항선을 돌파하다가 중공군 전초병에게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다. 포복자세로 기어가던 2인 1조가 붙잡히고 말았다. 우리들이 비무장인 것을 알고 그들은 조용해졌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상황은 끝났다. 우리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각오를 다진 전우들이었다. 들키지 않고 숨어 있던 다섯 명도 항복 시늉을 하며 그들에게 다가가 합류했다. 1차 탈은 그렇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해방 전사

길 동편 골짜기 외딴집에 중공군 중대병력이 임시 거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들을 심문했는데, 통역관이 없었다. 나는 한자로 "解放 戰士 歸鄕 中(해방 전사 귀향 중)"이라고 써서 보였다. 그들은 나의 묘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택동부대가 장개석 부대와 싸울 때, 장개석 군대의 포로들을 교육시켜 귀향시켰다는 내용이다.

포로로 끌려 다니는 일곱 명의 우리 일행은 1인분 식사를 나눠먹었다. 디딜방아로 쌀 한가마니를 도정해 주고 동쪽방향으로 행군했다. 그 길로 계속 가면 강릉으로 가는 길이었다. 야산 평평한 능선에 1개 부대가 있었다. 그곳에 주둔한 부대는 주변 일대를 총괄 지휘하는 본부 같았다. 중공군 고문단이었다. 우리 일행을 간략하게 심문하더니 식사를 하게하고는 다시 행군에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홍천시내 북쪽 산 밑에 방공호에 홍천군당인민의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 인민위원회에 인계되었는데 조그만 오두막집에 투숙시켜놓고 감시에 들어갔다.

<12월25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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