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너그러움에 대하여

김수용 사회부장
김수용 사회부장

너그럽게 살기가 힘든 세상이다. 다양성의 사회가 됐지만 포용성은 줄어버렸다. 가치 판단의 기준이 저마다 달라진 탓이라고 치자. 달리 말하자면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점이 달라서 서로 다른 견해가 나오는 것인데, 도무지 이를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은 정의이자 선(善)이고, 그에 반하는 것은 '불의'여서 척결해야 할 대상이 된다.

가치 판단의 기준이 다른 것은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도 있다. 물론 그저 이해관계의 차이라는 단순한 이유로만 포용성이 줄어든 것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상대방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 현재의 상황, 특정 사건이 미칠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고는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쉽사리 규정지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듣고 보고 배워서 옳다고 믿게 된 신념, 종교, 가치관이 하나의 집단의식 속에서 공통분모로 발현됐을 때 그것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폭력적인지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봐 왔다. 전쟁, 학살, 인종청소 등 극단적 형태뿐 아니라 착취, 억압, 수탈 그리고 차별 등과 같이 지속적이고 때론 은밀한 형태로 이런 악행들이 벌어져 왔다.

너그러움은 흔히 '관용'(寬容)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관용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또는 그런 용서'라고 돼 있다.

하지만 관용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정치적 의미는 다르다. 우선 '남의 잘못'이라는 전제가 없고, '용서'라는 결론도 없다. '네가 잘못했지만 내가 봐줄게'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굳이 '잘못'과 '용서'를 고집스레 집어넣어야 한다면 중간에 들어 있는 '너그럽게'가 이를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바꿔 말해서 나 자신도 인간으로서 근본적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당신이 저지른 잘못을 폭력적으로 바로잡아 나의 가치관과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지난해 뉴스 지면을 가득 채웠던 최저임금, 주당 근로시간, 소득주도성장, 그리고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대체 복무, 직장 내 갑질, 미투 운동 등을 둘러싼 갈등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는 관용의 사회에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무엇보다 적폐 청산은 당위성과 필요성을 백번 인정하면서도 과정에 대한 아쉬움은 떨칠 수 없다.

잘못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명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폭력적이고 배타적이어선 안 된다. 입시제도 개편을 비롯한 교육개혁, 부동산 문제 해결, 경기 부양 등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해결할 것으로 기대했던 많은 희망들이 그다지 결실을 맺지 못한 채 한 해가 저물었다. 현 정권에 대한 지지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 것은 이런 희망에 대한 배신감이 컸던 탓도 있겠지만 이른바 전 정권에 대한 적폐 청산 작업이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한 채 이뤄진 탓이 아닌가에 대한 겸손한 자세의 반성도 필요하다.

행여 위정자들이 '보수는 악이고, 진보는 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을까 봐 염려스럽다. 물론 그 반대도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는 신념의 문제다. 아울러 너그러운 관용의 대상이다.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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