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마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이숙현 동화작가·구미금오유치원 원장
이숙현 동화작가·구미금오유치원 원장

벼르던 일을 벌였습니다. 새해니까요. "엄마,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부쩍 자란 아이는 언젠가부터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익숙해진 공간을 비우고 새로운 시간으로 채우고 싶은 눈치였어요. 날마다 우리가 지내는 집, 이곳을 새롭게 하기. 사실, 아이의 바람은 나의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일단 작은 방에서 침대와 책장을 꺼냈습니다. 거실 여기저기 책 탑들이 생겨나고 온갖 물건들이 바닥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지요.

"세상에, 여기 있잖아!" 여행을 가서 두고 온 게 틀림없다며 하룻밤 묵었던 먼 거리 숙소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찾아주길 거듭 부탁했던 남편의 흰색 전자펜이, 작은 방 귀퉁이에서 먼지 옷을 입고 누워 있었습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없다며 애타게 찾던 양복바지도 찾았습니다. 아무렇게나 얹어둔 다른 옷들에 깔려 맨 아래 숨죽이고 있더군요. 얼마나 정신없이 살아왔는지 깨닫게 하는, 곳곳의 흔적들과 놀라운 발견! 거기엔 시간의 주름이 먼지와 함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나 여기 있어요!'라고 외치고 있었어요. 무엇 때문에 이토록 바쁜지 헤아릴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내달리느라 잃어버린 소중한 순간들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먼지를 닦아내고 쓰다듬었습니다. 손끝에서 가슴으로 흘러드는 나의 추억, 나의 생각, 나의 느낌, 그리고 나의 영혼….

전자펜·양복바지 여기 있었네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사계절)에서 '현명하고 나이 든 여의사'는 자신을 찾아온 남자에게 말합니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라고요. 마음에 훅 들어와 버린 첫 문장에 몸이 휘청, 곁에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영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살아온, 잊어버린 나의 영혼에 대해서요.

새해 첫날, 느닷없는 부고를 마주했습니다. 이 세상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이른, 동료 작가의 어린 딸 귀천(歸天) 소식에 절로 두 손 모아지고 입속에서 주문처럼 말들이 되뇌어졌습니다(부디, 고통 없는 그곳에서 신나게 놀기를…). 얼마 전 하늘나라로 떠난 존 버닝햄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내어주신 그림책들처럼 그곳에서도 어린이 마음으로 어린이들 곁에 함께해 주신다면 참 좋겠단 상상을 했습니다.

2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온 책, '윤미네 집'(PHOTONET)은 첫딸 윤미가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 흑백사진으로 담아 놓은 사진집입니다. 결혼 전 데이트하던 시절부터 작가가 하늘나라로 떠나기 직전까지 찍은 아내 사진들도 간추려 함께 묶여 있지요. 책 안에는 흑백사진마다 어려 있는 빛처럼 환하게 따스한 작가의 사랑이 가득합니다. 책장을 넘기는데 코끝이 맵고 가슴이 저리듯 아파왔습니다. 책 뒤편 작가의 글 속, 정현종의 시 '견딜 수 없네'에서 까닭을 알았습니다. 그건 바로,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흐르고 변하는 것들', '아프고 아픈 것들', 그러니까 '시간의 모든 흔적들'이 사진을 통해 너무나 또렷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새삼 일상의 모든 순간이 소중

2019 새해가 밝고, 당신과 반갑게 처음 만난 이 순간 역시 어김없이 지나가겠지요. 모래시계 속 모래알처럼 빠르게 떨어져 내리는 시간들을 거꾸로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새삼 일상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거듭 태어나는 새로운 시간으로 순간순간을, 새날로 꾸려가고 싶어집니다. 지금 이 글을 읽어주시는 당신과 함께요. 다시 만날 때까지 책마담('책'으로 '마'음 나눔, '담'소) 누리시길요!

이숙현 동화작가·구미금오유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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