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창원의 기록여행] 그녀들의 반기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인권을 유린하는 사회문제라 하여 반기를 높이 들고 부당국의 검진에 항거한 대동권번 기생 아씨 백여 명은~'(남선경제신문 1948년 7월 10일)

1948년 6월 하순.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대구의 대동권번 기생들이 다급하게 모였다. 100여 명의 전체 기생 중 70여 명이 참석할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저마다 앞다퉈 목소리를 높이더니 이내 대구부를 성토했다. 파업과 다를 바 없는 영업 중단도 불사하겠다는 강경 발언에 박수가 터졌다. 무슨 이유로 대구의 기생 아씨들이 한목소리로 분노를 하게 된 것일까.

'기생들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동시에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대구부 보건 당국의 일방적인 발표 때문이었다. 기생들은 발끈했다. "병이 있다면 누가 말하기 전에 스스로 진료를 받지 않겠느냐"는 게 기생들의 항변이었다. 기생들은 자신들을 잠재적 병균 감염자로 취급해 강압적으로 검진을 하려는 대구부의 처사에 분개했다. 이는 자신들을 온전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무시한 결과라고 봤다. 기생이기에 당하는 설움이었다. 곧 인권유린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반기를 든 이유였다.

이유는 더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들은 서울이나 부산의 기생들과는 다르다고 여겼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영혼을 파는 천한 기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구에 뿌리를 둔 '토종 TK' 기생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신들은 노래와 춤, 시문학 같은 예능을 익힌 예기로 함부로 무시당하는 데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헛말은 아니었다.

당시 기생은 되고 싶다고 무턱대고 될 수는 없었다. 일정한 수련 과정을 거쳐야만 자격이 주어졌다. 지금의 학원과 같은 기생 양성소를 수료한 뒤 자격시험인 예기시험을 치렀다. 노래나 춤 등의 예능을 제대로 익혔는지를 테스트해 합격과 불합격을 판정했다. 시험 과목도 만만찮았다. 시조와 성악, 무용, 품행시험, 권주가 등이었다. 권주가라니! 매상을 올려야 하는 기생의 현장실습 과목이었을까.

그들은 그 나름 직업인으로서의 긍지가 있었다. 사회적 활동과 공연을 통해 존재 가치를 뽐냈다. 해방 이듬해 대동권번의 교육생들이 창립연주회를 대구극장에서 사흘 동안이나 연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웃이 어려울 땐 재능 기부도 아끼지 않았다. 수해가 났던 1947년에는 기생 130여 명이 이재민 돕기 공연을 펼쳤다. 공연 입장권도 그들이 직접 거리에서 팔았다. 고급 공연의 입장료가 100원이었던 그때 10만원이란 큰돈의 성금을 모았다.

그런 기생들이었기에 자신들을 멸시하고 강행하려는 검진에 배신감을 느끼며 반기를 들었을 것이다. 그게 다는 아니었다. 수시로 당했을 인격적 수모를 견디다 못해 폭발한 측면이 컸다. 결과적으로 차별을 거부하는 약자의 저항으로 비쳐졌지만 말이다. 60년이 흘러도 세상은 바뀐 듯 바뀌지 않았다. 기생은 온데간데없지만 다양한 갑질 문화의 계단은 차곡차곡 쌓였다. 분노하면서 체념할 정도다. 잊을 만하면 터지니까.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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