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리학 대학자 구미 인동 출신 여헌 장현광] <10·끝> 위대한 학자, 영원한 스승으로 기억되다

2014년 3월 구미시 임수동에 개관한 여헌기념관. 전병용 기자
2014년 3월 구미시 임수동에 개관한 여헌기념관. 전병용 기자
여헌기념관 내부.
여헌기념관 내부.

〈1〉 선생의 탄생과 인동 장씨
〈2〉 짧은 수학기, 드높은 학문적 지향
〈3〉 잇단 슬픔과 굴곡진 삶의 여정
〈4〉 관직의 길 오르다
〈5〉 학문 연구와 강학의 기틀 마련하다
〈6〉 강학 통해 문인 배출하다
〈7〉 서원과 향교의 재건, 그리고 선현추숭사업
〈8〉 인조반정과 산림으로의 징소
〈9〉 광대한 학문체계를 집대성하다
〈10〉 위대한 학자, 영원한 스승으로 기억되다

1635년 4월, 여헌 선생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살피며 길흉을 점쳤다. 가을에 접어들 무렵 태백성(太白星)이 하늘에 뻗쳐서 천상(天象)의 변고가 여러 번 나타나자 여헌 선생은 주역을 펼쳐 점을 쳤고, 나라에 큰 변란이 생길 것을 예감했다.

이후 1년여가 지난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여헌 선생은 구미 인동에서 포항 입암으로 거처를 옮겼고 하늘과 땅의 조짐을 살핀 후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예감했다.

입암정사로 거처를 옮긴 여헌 선생은 이곳에서 자신의 마지막 생을 정리할 결심을 했다. 80여 년의 삶을 돌아보았다.

천하제일의 인물이 되고자 기약했던 패기에 찬 젊은 시절, 길지 않은 출사의 시간과 제자들을 길러내며 학문 연구와 강학에 열중했던 시간들, 산림으로 징소돼 충정을 아끼지 않는 가운데서도 학문의 결실을 하나씩 맺어 왔던 노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갔다. 그러면서 여헌 선생은 84세에 이른 노쇠함과 마주했다.

그리고 문인들에게 일찍이 짜 두었던 베를 내어 주면서 심의(深衣)를 만들도록 했다. 심의를 만들라고 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8월 여헌 선생은 병으로 자리에 눕고 말았다.

하지만 병세는 더욱 악화돼 의원이 다녀가고 온갖 약을 다 써보았지만 백약이 무효했다. 입암정사에는 아침에 하늘이 캄캄하고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84세의 나이로 입암정사 만욱재(晩勖齋)에서 고요히 영면에 들었다. 만욱재 좌우 벽에는 그가 마지막까지 마음을 다스리며 도덕 사업에 매진하고자 하는 뜻을 담아 적은 좌벽제성(座壁題省)만이 덩그러니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해 12월 여헌 선생은 금오산 동쪽 기슭인 구미시 오태동의 양지바른 언덕에 묻혔다. 조선 유학의 사표인 길재의 묘로부터 멀지 않은 곳이었다. 장례에는 문인 3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여헌 선생이 영면하고 위패를 봉안하려는 서원들이 줄을 이었다. 길재를 모신 오산서원, 정몽주를 모신 임고서원, 주자의 위패를 모신 천곡서원, 금오서원, 빙산서원, 청송의 송학서원 등에 여헌 선생의 위패가 배향됐다.

특히 효종 5년(1654) 3월 여헌 선생이 오랫동안 강학을 했던 부지암에 서원이 건립됐다. 여헌 선생을 주향으로 하는 '부지암서원'이 마련된 것이다. 부지암서원은 숙종 2년(1676) '동락서원'으로 사액됐다.

이처럼 여헌 선생 사후에 경상도 지역에서는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여헌 선생의 위패를 주향으로 모시거나 배향하는 서원들이 8곳에 이를 정도로 그의 학문과 사상은 높게 평가받았고, 이를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 또한 더해갔다.

올바른 가치를 세우고 실현하려는 그의 인생 역정은 선비의 모습 그 자체였으며, 위대한 학자, 영원한 스승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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