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이 뜻밖에도 '징비록'을 소환했다. 집권 여당과의 불화로 장외를 떠도는 자유한국당이 소환 주체다. 며칠 전 청와대 앞에 몰려간 한국당 의원들은 문재인 정부의 10대 정책이 '국가 경제 기초를 흔들고 민생 불안을 키웠다'며 실정(失政)을 성토했다. 지난 2년간 경제 난국을 비판하는 백서를 보란 듯 펼쳐 보이며 잘 준비된 '정치 쇼'를 연출한 것이다. 이를테면 징비록의 '왜란'(倭亂)에 빗대 '문란'(文亂)을 부각하려는 게 한국당의 속셈이다.
청와대는 백서 접수를 거부했다. 문 정부에 '실정'의 굴레를 덮어씌우는 야당의 뻔한 정치 술수로 봤기 때문이다.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라'며 여항(閭巷)을 부추기고 금융 시장과 집값을 들쑤신 한국당이 '징비록'을 들고나와 정부 비판에 열을 올리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늪이라도 내가 가면 바로 길'이라며 고집을 피우는 청와대와 여당 또한 국민 눈에 한국당보다 더 미더워 보이지는 않는다.
미·중 무역 전쟁과 내리막길 수출, 1분기 마이너스 성장률, 환율 불안 등 어려운 경제지표는 일단 옆으로 밀쳐두자. 뭐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문 정부가 철벽처럼 세운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정책 프레임이 민생 안정과 계속 엇박자가 나고 있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 대한민국이 나아가는 방향이자 국가 정책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남보다 더 많이 일해야 입에 풀칠하는 국민이 많은 차에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축이 '워라밸의 저주'가 되고 있다면 "아차"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문 정부는 단호하다. 조금 더 가면 성과가 나오는데 여기서 접을 수 없다며 여전히 '닥공' 모드다. 세금 물꼬를 완전히 터서라도 돈이 시정(市井)에 돌게하면 정책 목표에 이르고 효과가 나온다는 투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다. '항우는 고집으로 망하고 조조는 꾀로 망한다'는 속담에 더 가깝다. 노동자들이 조금 더 적게 일하고 임금 수준을 지킬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있겠나. 그러나 실제 민생 현장에서 이런 나긋한 희망은 고문에 가깝다.
정부가 또 세금 카드를 꺼냈다. 경기 둔화에 대비한다면서 6조7천억원 규모의 추경 예산안에 손도장을 찍으라고 한국당을 압박한다. 쓰려고 거두는 게 세금이다. 그러나 '쏟아부은 세금이 도대체 얼마인데'라는 불만이 높다면 사실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소리다. 제1야당도 설득하지 못하는 집권당의 오만함은 국민의 공감대와는 거리가 멀다.
정부의 정책과 국회의 입법은 여론과 민주주의를 담는 그릇이다. 아무리 겉보기에 훌륭하고 단단해도 그릇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비록 이가 빠지고 덕지덕지 때가 껴도 그릇에 담긴 것이 알차고 바르면 그릇도 빛이 나는 법이다. 지금은 그릇이 아니라 그릇에 담을 것을 봐야할 때다. 이런 진지한 고민이 없다면 아무리 비싼 명품 그릇도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게 세상 이치다.
징비록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다. 400여 년 전, 두 차례의 왜란을 전후해 조선의 집권층과 각 정파 세력은 정세를 제대로 판단하고 대처했나. 지금 관점에서 봐도 당시 사대부 권력 집단들은 지독했고 또 한심했다. 국론은 물과 기름처럼 조금도 섞이지 못했고, 계층은 양분됐으며 민심은 어지러웠다. 그러니 민생 파탄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때와 지금이 닮은 구석 없이 전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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