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특별기고]독립운동에서 대구의 역할, 제대로 기리자

시립 역사박물관 건립 서둘러 추진
독립운동 유적지 보존하고 기려야
대구·중국 연계한 탐방 코스 개발
3월 8일 만세운동일 범시민행사로

이헌태 민주댕 대구북구갑 위원장
이헌태 민주댕 대구북구갑 위원장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대구에서도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리고 서적도 출간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2년 전 대구의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인정받은 뒤라 더욱 뜻깊게 느껴진다.

그런데 많은 대구시민들이 국채보상운동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일제의 침탈에 우리 대구사람들이 더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맞섰던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대표적으로 구한말 최초의 의병장은 대구 출신의 의산 문석봉이다. 의산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벼슬을 하고 있던 충청도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그 병사 수는 1천여명에 이르렀다.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은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그의 봉기는 의병 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폭제의 역할을 한 것으로 의병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산의 생가터는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 성하길 68-7번지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안내판조차 없다.

3·1운동이 있기 전 1910년대 국내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독립투쟁단체는1915년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이다. 총사령은 왕산 허위의 제자 박상진이며, 전국 각도를 비롯해 만주에까지 지부를 두었다. 현재 충남 예산군에는 충청도지부장 김한종 지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웅장하게 세워져 있는데, 본부였던 대구, 특히 달성공원에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대한광복회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의열단은 1920년대 대표적인 항일무장단체이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될 때 밀양과 대구사람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단장은 김원봉, 부단장은 이종암이 맡았다. 대구 출신인 이종암은 자금 마련 등에서 핵심 역할을 하다가 1926년 투옥되어 1930년 병으로 가출옥한 뒤 남산동 집에서 순국했다. 집터(현 대구 중구 문우관길 30-26)는 방치되어 있다.

대표적인 사례 세 건만 예시했으나 국채보상운동을 넘어 대구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서 했던 결정적인 역할을 기릴 수 있는 사례와 인물은 대단히 많다. 이제부터라도 대구에서는 독립애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다양한 활동에 나서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대구시립 역사박물관을 하루빨리 건립해야 한다. 역사박물관을 짓고 이곳에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이 펼친 눈부신 활동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야 한다는 여론에 대구시가 이를 추진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 사업을 서둘러야 한다.

둘째로 대구 독립운동 유적지를 보존하고 기려야 한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중요한 유적지가 산재해 있으나 방치된 곳이 수두록하다. 필자는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지사 현양사업을 선도했고 의열단원인 이육사 시인의 남산동 생거지 보존을 민주당과 대구시 정책간담회 때 건의했는데, 이제는 대구시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셋째로 대구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코스 개발을 제안한다. 대구지역과 중국지역 두 코스로 개발할 수 있다. 중국지역은 만주 일대와 북경으로 이어진다. 대한광복회는 만주 본부 길림광복회를 운영했다. 의열단은 길림성 이종암의 집에서 결성했으며 단원들은 주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서간도(길림성 통화시 류하현)에서 개교했다. 의열단 단원이었던 애국시인 이육사는 1944년 북경 일본영사관 헌병대 지하감옥에서 순국했는데 아직도 건물이 남아 있다.

넷째로 3·1절 기념 범시민행사일 변경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대구의 만세운동일은 1919년 3월 8일이다. 일제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가장 큰 행사는 3·1절이고 국가기념식은 3월 1일에 진행한다고 해도 대구의 범시민행사는 실제 대구 만세운동일인 3월 8일에 만세길을 따라 재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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