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스케치] 정주영·이병철을 10만 원권 인물로?

박병선 논설위원
박병선 논설위원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중 한 명을 언젠가 발행될 10만원권 지폐 인물로 하면 어떨까? 모르긴 해도, 국민의 80% 이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상당수는 "백범 김구 같은 애국자를 놔두고 자기 욕심만 차린 기업가를 감히…"라며 분노할 것이 뻔하다. 반기업적 정서가 노골적인 이번 정권에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이런 뜬금없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일본이 2024년부터 새로운 1만엔권 지폐 인물로 기업가인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1840~1931)를 택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좌파 성향 학자들이 '국가 주도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며 비판했지만, 소수일 뿐이고 대부분 환영하는 분위기다. 정작, 한국에서는 조선의 경제 침탈에 앞장선 제국주의 시대 인물을 택한 것은 일본의 의도된 도발이라며 경계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극우 성향에 비춰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렇다고 시부사와는 낮춰 볼 만한 인물이 아니다.

게이오대학에서 경제사를 공부한 김명수 교수(계명대 일본학과)는 시부사와를 이렇게 평했다. "일본 자본주의의 설계자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날 일본만의 독특한 경영 풍토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500여 개 회사 설립에 관여하면서 자신이 소유·경영하기보다는 인재를 유학 보내고 능력에 맞춰 경영을 맡길 정도로 혁신적이었고, 공익과 사익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경영 철학에 따라 600여 개 학교·복지기관 등의 설립에 참여한 선구적인 기업가였다."

시부사와의 경영 철학은 어릴 때 공부한 유교를 기반으로 한 '도덕경제합일설'(道德經濟合一說)이다. '공익이 될 정도의 사익이 아니라면 진정한 사익이라 할 수 없다. 부를 쌓고 영달하는 행위와 인간의 도리인 인의도덕은 합치 병행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기업가가 아니라 고매한 사상가를 연상시킨다.(시부사와 에이이치 기념재단에서 발행한 전기집은 무려 권당 700쪽이 넘는 책 68권으로 구성돼 있다.)

그는 당시 '사농공상' 신분 서열에서 제일 밑바닥인 상인의 지위를 가장 위층으로 끌어 올린 인물이다. 1899년 도쿄고등상업학교(현재 히토쓰바시 대학) 졸업식에서 이렇게 축사했다. "상인이 명예로운 지위가 아니라고 누가 말했나? 상업으로 국가의 홍익(鴻益)을 가져오고 공업으로 국가의 부강을 도모할 수 있다. 상공업자의 실력은 능히 국가의 위치를 높이 올리는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단순한 경영자가 아니라 기업조직가이자 사상가이면서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일본에는 '경영의 신' 마쓰시다 고노스케(松下幸之助·1894~1989), '혁신 기업가의 표상'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郎·1906~1991) 같은 국민적인 존경을 받는 기업가가 여럿 있다. 이들은 '기업은 공공재'라는 철학을 가졌으며, 고생하면서 기업을 일궜지만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한국과 일본에서 기업가를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과 달리, 한국인은 원래부터 기업가를 질시하고 미워하는 DNA를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기업을 자신과 가족의 배만 불리는 수단으로 여기거나 공익 기여도가 미미한 풍토이다 보니 존경받는 기업인이 거의 없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만 해도 젊을 때에는 존경·명예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가 무료'로 인식되던 시절, 소프트웨어를 상업화해 야유받았고, 워런 버핏은 주식 투기꾼일 뿐이다. 이들은 나이 들어 천문학적인 기부와 공익 봉사에 나서면서 신망을 얻었으니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의 전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지폐 인물이 될 만한 '존경받는' 경제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한국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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