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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때때로 자유를 갈망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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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옥 소설가

장정옥 소설가
장정옥 소설가

자신에게 물어본다. 누군가를 의식하며 글을 쓴 적이 있는가? 그 누군가는 자기검열이라는 이름의 억압된 자의식과 왜곡된 시각을 이르는 말일 터. 소설 속 인물의 원형이 가까운 곳에 있을수록 천사화하거나 표현이 위축될 가능성이 많다. 작가의 영혼이 온전히 자유로울 때 자유로운 글이 나온다. 자신을 키울 수 있는 이는 자신밖에 없으니, 진실한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자기통제의 틀을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

첫 번째 소설을 발간하고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그때 평론가 김양헌 선생님이 참석하셨다. 그분이 지금껏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병고가 깊을 때였는데도 선생님은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다. 선생님은 유언인 듯 진실한 글을 쓰라고 말씀하셨다. 그날의 마지막 포옹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진실한 글. 자신을 기만하지 않는 글.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글.

자기검열의 틀을 벗어던지기 위해 나를 뚝 떼어서 벽장에 집어넣는다. 자기애보다 큰 훼방꾼은 없다. 무슨 글을 어떻게 쓰건 요점을 분명히 파악해야 길을 잃지 않는다. 소설 속에는 내비게이션도 없고, 표지판도 없고, 길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에 홀로 서 있는 게 소설이다. 여전히 버겁고 뜻을 파악하기 어려운 상대지만 오래 가까이하다 보니 이제는 둘도 없는 친구 같다. 때때로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나를 토닥여주기도 하고 틈을 보여주기도 한다. 글의 위로를 받다 보면 든든한 친구가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잘 써보자는 각오도 생긴다. 아이들이 자라는데 시간이 필요하듯이 글도 마찬가지, 자라는 것도 늦되고 글도 늦되어서 늘 혼자 달리는 기분이었다. 글을 쓸 때도 그런 기분을 자주 느꼈다.

질문을 바꾸어본다.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때때로 머리에 떠오른 사람이 있긴 하지만 까뮈의 어머니 같은 절대적인 인물은 없었다. 힘들여 쓴 글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까뮈의 유고작에 씌어 있는 헌사처럼 생애를 통틀어 단 한 사람이라고 손꼽을 수 있는 이에게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기도 했다. 귀가 어둡고 글까지 몰랐던 어머니, 까뮈 소설의 원형은 바로 그 어머니의 침묵이었다. 내 영혼을 촛불처럼 밝혀줄 원동력이 무엇인가 돌아보니 그것은 바로 희망을 추구하던 희망 없음의 절대적 고독이었다. 어둠에 갇힌 자신에게서 자유롭고 싶었던 갈망. 어쩌면 나는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정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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