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으로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는 평준화되어 있다. 현실은 이와 다르다. 학군 간, 학군 내 고등학교 사이에 학력 차이가 존재한다. 서울 강남 3구, 대구 수성구, 부산 해운대구, 대전 유성구의 의대, 명문대 진학률이 높다. 이들 지역의 집값이 비싼 것은 의대, 명문대 진학률과 관계가 있다.
비슷한 수준의 교사를 배정하고 표준화된 교과과정을 도입해도 고등학교는 평준화되지 않는다. 학생이 다르기 때문이다. 직업과 소득에 따른 계층이 존재하고 계층별로 거주지역이 분리된 현실에서 학생을 근거리 배정하면 학교 간 학력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부모의 교육,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에 위치한 고등학교 학생들의 학력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다. 근거리 배정과 고등학교 평준화는 양립이 불가능하다.
언제부터인가 과학고와 외국어고가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다. 취지는 좋았다. 국가 발전을 선도할 과학 영재, 외국어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특목고(特目高)를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과학고와 외국어고는 의대나 명문대를 진학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과학이 좋아서, 국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 외국어 전문가가 되기 위해 특목고에 진학하는 학생은 많지 않다.
특목고 성공에 자극을 받아서(?) 개인 또는 기업이 '전국형' 자율형사립고를 설립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민족사관고, 상산고, 하나고, 포항제철고이다. 이들 학교는 전국의 중학생을 대상으로 신입생을 모집한다. 실질적으로 평준화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최근 인가가 취소된 서울의 8개 자사고는 전국의 중학생을 대상으로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는다.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이들은 학부모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진정한 의미의 '지역형' 자사고이다.
고등학교 생태계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수도권 소재 과학고가 있다. 그 아래에 비수도권 소재 과학고와 민사고, 하나고 등의 전국형 자사고가 위치한다. 그 아래에 수도권 소재 외국어고, 서울 강남의 고등학교가 있다. 지역형 자사고는 강남 소재 고등학교 밑이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최하층은 '일반고'이다.
인가가 취소된 8개 자사고 중 7개는 비강남에 있다. 강남의 자사고는 1개가 취소되었다. 서울의 경우 현재 비강남에 4개, 강남에 9개의 지역형 자사고가 있다. 이 결과는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지역형 자사고가 필요한 지역은 비강남이다.
사실 강남 소재 고등학교는 자사고로 전환할 이유가 없다. 국가 지원금을 받으면서 근거리 배정 원칙에 따라 우수한 학생을 받으면 된다. 학생은 사교육을 통해 의대나 명문대에 진학한다. 학교가 할 일이 별로 없다.
지역형 자사고는 평준화를 깬 주범(主犯)이 아니다. 종범(從犯)도 아니다. 평준화는 오래전에 깨졌다. 아니 평준화는 달성된 적이 없다. 서울 강남과 비강남의 학력 차이는 1980년대부터 존재했다. 그 차이가 커졌을 뿐이다.
지역 간 학력, 진학률 차이를 심화시킨 요인은 수시모집과 쉬운 수능이다. 이는 현행 대입제도의 특징이다. 대학 정원의 상당 부분을 수시모집으로 채우면 스펙이 없는 학생이 불리하다. 수능을 쉽게 출제하면 사교육을 통한 반복 학습이 위력을 발휘한다. 사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이 불리해진다. 정시모집, 어려운 수능이 스펙이 없고 가난하지만 우수한 학생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특목고와 전국형 자사고로 인해 비강남의 학교는 황폐화되었다. 강남에 거주할 수 없고 특목고나 전국형 자사고에 진학하지 못한 중산층 학생에게 지역형 자사고는 유일한 대안이다. 돈이 많아서 지역형 자사고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형 자사고를 평준화의 적으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지역형 자사고가 일반고 재학생의 불만의 대상일 수 없다.
자식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 맨 중산층 학부모는 정당하다. 특목고와 전국형 자사고의 태풍이 지나간 폐허에서 분투하는 지역형 자사고 교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지역형 자사고(自私高)는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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