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5일. 밖에 내건 태극기가 태풍의 영향으로 비에 젖어 후줄근했다. 최근 논란의 중심인 '반일 종족주의' 책 띠지를 뗐다. 대표저자 이영훈 교수의 책머리 글도 읽지 않고 목차를 보고 곧바로 151쪽 '13. 독도, 반일 민족주의의 최고 상징'을 펼쳤다.
집필자 이 교수는 독도 주장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참된 지식인으로서,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를 믿고 소신 발언'을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 교수는 첫 주제에서 '삼국사기'의 우산국과 울릉도를 거론하면서, 사기의 '우산'은 나라 이름일 뿐 그 안에 독도가 포함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다만 지금 학계에서는 이것이 우리의 독도에 대한 첫 인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세종실록지리지' 우산과 무릉을 거론하고 있다. '15세기까지 한 개의 섬'이라는 주제까지 이어지는 글에서, 조선은 줄곧 울릉도와 독도를 한 개의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이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산과 무릉 두 섬은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좋으면 바라볼 수 있다"는 기록은 그의 주장대로 '상상의 산물'이란 말인가. 이후 사료에는 '더러는 두 섬은 하나의 섬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기술도 있다. 일본인들 주장대로 우리 조선실록은 소설이고, 그 사관(史官)들은 소설가인가.
이후 이 교수의 계속되는 주제들은 '독도'는 모두 환상일 뿐이라며, 울릉도와 독도가 뒤바뀌거나, 독도가 없는 고지도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 학계에서도 조선 중기 독도에 대한 인식에 혼란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당시 일본은 울릉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불렀다. 한국과 일본 다수의 학자들은 당시 지리적 인식이 오늘날과 다름을 인정한다. 고지도가 국경의 결정적 증거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1900년 대한제국 칙령41호의 '석도'를 독도라고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독도는 돌섬이 아닌 바위섬이라고 하면서 칙령의 석도는 관음도라고 못 박고 있다. 돌섬의 전라도 사람들 사투리 '독섬'을 한자식으로 표기한 독도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관음도를 '깎새섬'으로 불렀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수목이 우거진 관음도를 왜 굳이 석도라고 불러야 했을까. 또 1800년대 거문도 등 전라도 사람들이 독도에 가서 강치를 잡아 부산의 일본 상인한테 팔았던 것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우선 급한 대로 몇 가지를 일별해 봤다. 이 교수는 이케우치 사토시(池內敏)를 비롯한 독도를 부정하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많은 부분 옮기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은 1877년 태정관지령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고 했을까?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 전국에 대한 지적조사를 했다. 이때 시마네현이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지적조사 여부를 문의하자 당시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태정관은 일본 땅이 아니라면서 지적조사를 못 하도록 했다. 도대체 이건 어찌 된 것인가?
나는 학자가 아니다. 앞으로 독도학자들이 이 교수가 능히 수긍할 만한 답변을 내놓을 필요가 있겠다.
'반일 종족주의' 책장을 덮은 나는 후줄근하다 못해 참담했다. 책의 다른 내용은 상당 부분 공감이 가지만, 독도는 책의 주제에 함몰되어 억지가 되어 버렸다. 이영훈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우리 국민은 독도를 '가장 신성한 토템'으로 숭배하는 박수무당 패거리에 불과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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