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사할린 동포의 친구, 대구 청년들

배성훈 디지털국장
배성훈 디지털국장

'사할린이 좋다고 내 여기 왔나/ 일본 놈을 무서워 내 여기 왔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우리 조선은 따뜻한데/ 그 땅에 못 살고 내 여기 왔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사할린 본조 아리랑'에는 일본 사람들이 무서워, 사할린에 건너온 사연부터 내 땅에 못 살고 타국에서 살아야 하는 외지인의 설움까지 다양한 색깔의 슬픔과 서러움을 담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동쪽, 일본 열도 북쪽에 있는 사할린은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속에 격변의 역사를 겪은 땅이다. 혼란이 끊이지 않았던 땅에는 모진 세월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살아간 사람들이 남았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대부분 일제 말기에 징용노동자로 잡혀왔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에는 약 4만3천 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강제징용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에는 합동추모비가, 8·15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귀국선을 기다렸던 코르사코프 항구에는 망향탑이 세워져 있다.

학살과 포탄을 피해 코르사코프 항구에 도착한 한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렸다. 1945년 해방 후 일본은 사할린에서 자국민을 귀환시키면서 조선인은 제외했다. 배가 와도 승선권은 일본인에게만 주어졌고, 언덕에 올라 다음 배를 기다리다 영영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 측의 일방적인 국적 박탈 조치로 귀환하지 못했고, 러시아도 송환을 외면해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들의 기구한 운명에는 피와 땀과 눈물이 서려 있을 수밖에 없다. 국가가 잊은 존재들이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해방 후 사할린에 남은 한인1세는 온갖 차별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무국적을 선택했다. 소련 국적을 가질 기회가 충분했지만 조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치기 싫었기 때문이다. 국가에 귀속되지 않는 그들만의 삶의 방식으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1994년 한일 정부가 뒤늦게 사할린 동포 시범 송환에 합의하여 약 4천300명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70여 년 전 '절망'으로 가득했던 사할린. 대구 청년들이 이곳을 방문하면서 더 이상 눈물의 땅이 아닌 희망의 땅으로 변하고 있다. 지난 2006년부터 사할린과 교류의 물꼬를 본격적으로 트기 시작한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는 사할린 동포들이 가장 환영하는 단체로 알려졌다. 대구 청년들은 매년 사할린 동포를 대구로 초청해 '사할린의 밤'을 열 뿐만 아니라 사할린을 찾아 '대구의 밤' 행사를 열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할린을 찾아 동포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왔다.

최근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강제징용 등 역사 문제가 관심사로 떠올랐지만 정부의 사할린 동포에 관한 내용은 잘 찾아보기 어렵다.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 사할린 한인 1세대는 현재 전국 4천300여 명에 이르지만, 자녀들은 영주 귀국에서 제외됐다. 사실상의 또 다른 이산가족이 된 셈이다. 함께 고국 땅에서 살기를 원하지만 정부의 지원 법안은 표류 중이며, 아픔을 치유하지 못한 채 속절 없이 세월만 흐르고 있다. 국회에 표류 중인 '사할린 동포 특별법'이 반드시 제정되어, 가족과 함께 영주 귀국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하루빨리 정부가 나서 개선책을 만들어야 한다.

'조국땅 동포들아/ 사할린의 땅 한인을 잊지 마라/ 이국만리에서 조국 사랑하는/ 사할린의 한인들이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 걸린 운강 이원술의 시가 가슴 한쪽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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