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고을, 구국에 나서다
성주의 구국(救國)활동은 유학 고을답게 일제 침탈에 맞선 국내외 유림이 돋보인다. 애국계몽과 국채보상, 해외독립기지 건설, 자정(自靖)순국, 비밀결사참여, 3·1만세와 파리장서운동, 의열투쟁, 임시정부·한국광복군까지 다양하다.
또 장기석(張基奭)과 부인 박씨, 이경환(李慶煥)과 부인 배씨도 일제에 저항, 목숨을 끊은 사연도 있다. 성주 출신 독립유공자도 85명(대구경북 2천266명·전국 1만5천689명)으로, 경북남부(경산·고령·대구·성주·영천·청도·칠곡)에서 대구(159명) 다음으로 많고 칠곡과 같다.
◆이교(異敎)와 손잡고, 파리장서 붓 떨친 유림
성주의 1919년 3·1운동은 유림 주축이 특징이다. 특히 4월 2일 성주시장 시위는 이념과 종교를 떠나 유림과 기독교계의 의기투합의 결과였다.
대가면 옥화동교회 유진성 조사가 유림의 만세 준비 소식에 송희근과 뜻을 모았다. 동학(천도교)과 천주교 전파, 확산을 꺼려 반대·배척한 과거와 다른 유림의 변화였다. 성주 만세운동은 3천 명이 모인 4·2시위와 3월 27일부터 4월 6일까지 7곳(선남·가천·성주·벽진·지사·대가·월항면)에서 8차례 펼쳐졌다.
앞서 3월 26일 공산 송준필(宋浚弼)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며 유림과 국민 궐기를 호소한 '통고국내문' 3천 장을 뿌렸다. 기독교계가 유 조사를 통해 송준필 조카 송희근과 만나 합의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성주인은 4·2만세로 2명 순국, 7명 부상, 송준필과 회당 장석영(張錫英) 등 30명이 기소돼 징역 5,6월과 1,2년의 옥고를 치렀고 송준필과 장석영은 감옥생활을 '심중일기'(瀋中日記)와 '흑산일록'(黑山日錄)에 남겨 당시를 증언·고발했다.
심중일기엔 송준필의 5개월 옥살이에 위로 방문한 254명을 실은 '문옥록'(問獄錄)과 1천275량에 조(粗) 1석의 부조금을 적은 '자의록'(滋義錄)도 덧붙였다. 성주 만세시위로 133명 체포, 52명 투옥, 부상 20여명, 사망 3명이 희생됐지만 유림·기독교계 합작은 더 빛났다.
특히 성주 유림은 파리장서운동에서 137명 서명자 중 송준필 등 15명(대구경북 62명)으로 가장 많다. 김창숙은 대표로 3월 27일 상해에 도착, 파리평화회의에 장서를 보냈고 각국 기관과 국내에도 뿌렸다.
그러나 4·2만세운동 때 장서운동이 발각되고 6월 파리장서 한문본이 드러나 서명자 전원 재조사돼 1·2심 유죄판결 18명 중 실형 인물은 곽종석(거창)·김복한(충남 홍주)·이봉희(성주)·우하교(대구 달성) 4명뿐이었다. 한편 파리장서운동 과정에서 젊은 유림보호를 위해 서명자 나이를 40세 하한(下限)한 점은 돋보인다.
◆나라 밖 독립운동의 별, 이승희·한지성
나라밖 성주인의 독립운동은 한계 이승희(李承熙)가 돋보인다. 유학자로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정미조약에 나라 위기가 닥치자 삶의 방향을 바꿨다. 아버지(이진상) 뒤를 이은 유학의 이념적 논쟁을 버리고 62세에 망명했다. 1908년 4월 부산을 떠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다시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특히 중국(길림성) 한흥동에 한인촌을 만들고 산동성 곡부 일대와 공자묘를 답사하고 공교회(孔敎會)를 세울 만큼 유학의 부흥에도 힘썼다. 한인 생업과 교육을 위해 앞섰고 숱한 난관을 겪다 1916년 70세로 요동 심양 서탑의 여관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두 아들(기원·기인)도 아버지처럼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한지성(韓志成)의 해외 활동도 특별하다. 성주(1926년)와 대구(1931년)에서 학교를 마치고 망명, 1932년 9월에 중국 국민당이 세운 남경의 중앙정치학교에 입학했다. 1936년 8월 졸업하고 고난의 독립운동에 나선 이력이 그렇다.
그의 모교 대구공립상업학교(현 대구상원고)는 1942년 학생비밀결사 '태극단' 결성의 주도 학교이니, 독립운동의 앞선 길을 간 선배였다. 본명도 재수(再洙)에서 '독립의 뜻을 이룬다'며 지성(志成)으로 바꿨는데, 조선의용대와 선전외교, 한국광복군 활동 등은 기릴 만하다.

특히 2차대전 때 한국광복군으로 1943년 8월 29일부터 1945년 9월 10일 중국 복귀까지 영국군 요청으로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된 인면(印緬)전구공작대 9명 대원의 대장 임무에 성공한 활동은 뛰어났다.
2차 대전 중 동남아 대표 전투의 하나로, 1944년 3월부터 7월까지 영국군과 일본군의 임팔 대회전에서 공작대의 결정적 기여로 '자루 속에 든 쥐'의 영국 사단은 전원 무사 철수했다. 광복군이 연합군과 펼친 군사 행동이니, 그가 이끈 인면공작대는 '임시정부가 2차대전 참전을 위해 편성한 한국광복군의 임무를 최전선에서 구현했던 유일한 부대'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북한의 서울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 행적으로 아직 잘 조명받지 못해 안타깝다. 정인열 기자 oxe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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