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병이 많아 집구석에 누웠는데/ 邇來多病臥深齋(이래다병와심재)
무슨 일로 은근하게 짚신을 보냈는가/ 底事慇懃寄草鞋(저사은근기초혜)
틀림없이 그 산중에 봄빛이 한창이라/ 想得山中春正好(상득산중춘정호)
날 불러 꽃핀 여울을 함께 걷잔 뜻이렸다/ 定應招我踏花溪(정응초아답화계)
이 시를 지은 수암(遂菴) 권상하(1641~1721)는 율곡 이이에서 시작하여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을 계승한 노론 계열의 학자다. 조선후기 험난했던 당쟁사의 한 복판을 관통했던 그가 한번은 큰 병이 들어 방콕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분이었므로 온몸에 좀이 쑤셨을 게다. 그 때 산속에서 살고 있는 은자가 난데 없이 짚신 한 켤레를 보내왔다. 왜 하필 짚신을 보냈을까? 깊은 산중에는 이제사 봄이 한창이니, 이 짚신 신고 내달려와서 꽃핀 여울을 함께 걷자는 뜻임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은근한 정이 어린 가슴 뭉클한 선물이다. 수암은 아마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짚신 신고 산으로 들입다 내달려가서 은자와 함께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얼마 전 일면식도 없는 어느 여류시인이 난데없는 소포를 보내왔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화들짝 뜯어보았더니, 나의 시선집 '웃지 말라니까 글쎄'의 간행을 축하한다는 정갈한 손 편지가 들어 있었다. 게다가 세상에, 좋은 시(?)를 읽고 가만히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서 뭔 선물을 보냈단다. 그 선물 꾸러미를 화들짝 뜯어보았더니, 그 속엔 파카 만년필 한 자루와 새하얀 마스크들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그 분은 왜 나에게 파카 만년필을 보냈을까. 이 만년필로 더 좋은 시를 정성들여 써보라는 뜻일 게다. 그분은 왜 나에게 마스크를 소복하게 보냈을까? 말할 것도 없이 유달리도 대구에서 야단벅구통을 벌이고 있는 광란의 코로나 바이러스를 잘 견뎌내라는 뜻일 게다. 만년필 선물이야 그 전에도 더러 받아보았지만, 마스크 선물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 무렵 우리 아파트 정면에 딱 버티고 서 있는 달성대실요양병원과 제2미주정신병원에서 200명이 넘는 천문학적 확진자가 쏟아진 상황이라, 감회가 정말 남달랐다. 갑자기 가슴에 뜨거운 것이 울컥 솓구쳐서, 눈물을 왈칵 쏟으며 한동안 울산 쪽을 바라봤다.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그동안 줄곧 맞짱을 떠 왔던 코로나 바이러스도 끝장이 날 터. 이쯤 해서 산중에 사는 그 은자가 나에게도 짚신을 한 켤레 보내주면 좋겠다. 그 짚신 신고 냅다 내달려가 사라지는 봄의 뒷모습이라도 같이 좀 맛을 볼 수 있도록.

이종문 시조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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