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로 집 앞 중학교 운동장이 폐쇄되면서 매일 저녁 산보 코스를 대구삼성창조캠퍼스로 옮겼다. 이곳은 1955년에 제일모직공업㈜ 공장이 들어서고 1995년 구미로 옮겨가기 전까지 40년간 명맥을 이어온 한국 섬유산업의 허브였다. 23만1천400여㎡(7만 평)에 이르는 이 침산동 부지에는 아직도 제일모직 본관 건물과 기숙사, 굴뚝 등이 남아 있다.
침산동과 칠성동, 태평로3가, 노원동, 원대동 등 대구 도심과 인접한 북구 일원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공업단지가 조성됐다. 59만5천여㎡(약 18만 평)의 농지가 공단으로 탈바꿈해 대한방직 등 수많은 섬유공장과 기계·고무·염색공장이 잇따라 들어섰다. 1960년대 한국 경제의 여명기, 대구 최초의 공단인 '제1공단'으로 재출발한 현장이다.
인근 주민의 휴식처가 된 이 캠퍼스에서 주목할 것은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의 흔적이다. 삼성의 모태로 중구 인교동 '삼성상회' 옛 건물이 실물 그대로 재현돼 있고 옆에는 호암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8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조금씩 옅어져 가는 한 기업의 역사이지만 대구에 남은 몇 안 되는 삼성의 흔적이다.
호암의 뒤를 이어 1987년부터 30년 가까이 삼성그룹을 진두지휘해 온 이건희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그는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언더도그'였던 삼성을 오늘날 초일류 기업으로 변모시킨 경영자였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소위 선진국 소비자들 눈에 삼성은 고작 싸구려 TV나 전자레인지 따위를 만드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1993년 이 회장이 독일 출장길에서 본 '삼성 세탁기 비디오테이프'는 삼성의 변신을 이끈 계기였다. 세탁조 덮개가 제대로 닫히지 않자 이를 억지로 맞추려는 모습이 담긴 이 비디오테이프 일화와 1995년 3월 구미공장 '무선전화기 화형식' 이야기는 유명한데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꾸라"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선언'이 나온 배경이다.
고인에 대한 평가는 아직 갈린다. 그러나 재임 기간 10조원에 불과하던 그룹 총매출액을 약 40배, 시가총액은 약 300배로 키웠다. 올해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623억달러(약 70조원)로 애플, 아마존, 구글과 함께 '글로벌 톱5'에 올랐다는 점에서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고인의 지론이 제 자리를 찾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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