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은 통역이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레짐작을 한다. 감성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매일매일 보고 듣고 먹고 말하면서 지레짐작만으로 상처를 주기도 또 받기도 한다. 시‧공간을 넘어 다양한 소통이 가능한 온라인 소통시대,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이다. 말은 한사람만 건너도 오역이기 쉽다. 그래서 말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다 보면 눈덩이처럼 커진다.
외국도서를 번역할 때 직역과 의역이 있는 것처럼, 감성에도 직역과 의역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직역과 의역이 언제 왜 필요한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경계를 안다는 것은 책을 쓴 저자의 의도와 생각에 가닿을 때 가능하다. 한권의 책을 통역하는 것과 한사람의 감성을 통역하는 것은 무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만큼 크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은 각자의 입장과 시각에서 다양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감상문을 쓰거나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는 일은 많다. 그러나 한사람의 감성을 두고 감상을 한다거나 토론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연극을 볼 때 무대에서 주인공이 부당하게 맞고 있다고 그 무대에 올라서 같이 싸우지 않는 것과 같다. 바로 예술과 현실 사이에는 '미적거리'가 있다. 관객이라는 입장에서 봐야하기 때문이다. 연극무대와 관객의 거리는 영화감상이나 독서를 하는 것의 관계와 같다.
코로나19로 우리는 지금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이다. 사회적 거리는 바이러스 전염을 막기위한 거리이다. 바이러스 백신으로 사회적 거리가 사라져도 우리가 지켜야 할 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개인과 집단의 감성생태를 위한 거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무대에는 시나리오도 감독도 연기자도 없다. 그래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스스로 감독이 되어 살아야하는 것이 삶의 무대다. 집과 학교, 사무실이나 일터에서 함께 하는 이들과 서로 보고 듣고 말하는 가운데 그만의 감성들이 교류하는 현실이라는 무대에서의 통역은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성은 일상 속에서 말로 눈으로 행동으로 마치 예술가가 작품을 하듯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서로를 조각하는 마음이다. 어쩌면 인류는 개인과 개인 그리고 사회와 사회 나아가 국가와 국가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조각해 온 삶의 역사다. 이렇듯 인간은 자연을 조각하고 도시를 조각하고 또한 친구와 연인이 되어 서로의 감성을 말로 눈빛으로 행동으로 조각하며 살아간다. 나의 감성을 조각하고 서로를 조각하는 감성생태, 말없이 가능한 감성통역의 삶이다.
눈으로 소리로 손으로 감각하는 대상, 그 대상은 감성생태를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다수와 개인의 감성이 투영된 장소 바로 우리의 몸이고 얼굴이다. 그것은 거울처럼 우리를 보게 하고 그 속에서 나를 마주하는 동안 마법과도 같은 감성소통, 서로를 투영하며 스스로를 조각하는 가운데 그 어떤 자각으로 눈을 뜨게 하고 귀가 열리게 하는 말, 감성생태의 원천이다. 자연의 생명, 도시의 문화 그리고 각각의 구성원 속에 깃들어 있는 것, 서로의 감성을 공감능력으로 조각하는 마르지 않는 샘, 바로 감성통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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