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고이 잠드소서!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죄송합니다. 요즘 거동이 어렵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힘듭니다."

지난해 5월. 코로나19로 사람 만나는 일이 기피되던 즈음, 그해 7월 20일 (가칭)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 발기인 대회를 앞두고 대구상원고등학교(옛 대구상고) 동창회를 통해 대전의 유일한 생존 독립운동가 정완진 졸업생을 발기인으로 추천받았다. 그러나 나이 등으로 발기인 참여가 어렵다는 가족 이야기에 미리 준비한 서류 작성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동창회가 그를 발기인으로 추천한 까닭은 학교를 빛낸 자랑스러운 옛 이력 때문이었다. 그는 1943년 5월, 대구 사회를 놀라게 한 당시 대구상업학교 비밀결사 '태극단'의 생존 단원이었다. 4학년이던 그는 한 단원의 밀고로 26명이 붙잡히는 사건에 휘말렸고, 이 사건으로 유일한 경북중 1학년생을 포함한 26명 학생에게 닥친 운명은 가혹했다.

4학년생 이상호 단장 등 6명이 징역형으로 김천과 인천의 소년형무소에 갇혔고 정완진도 6개월쯤 대구형무소에서 고문에 시달리다 풀려났다. 그러나 5학년 이준윤(1925년생)은 병을 얻어 풀려났으나 3일 만인 그해 10월 2일 숨져 대구형무소 순국 202명의 서훈 독립운동가 가운데 가장 나이 어린 희생자가 됐다.

1945년에도 인천의 이원현(4년)과 김천의 이상호가 각각 3월과 2월, 고문과 수감 생활로 얻은 질병으로 석방됐지만 그해 6월 14일과 12월 9일에 한 많은 눈을 감으면서 광복의 기쁨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후 정완진 독립운동가는 태극단 사건으로 동료 3명이 순국하는 아픔을 간직한 채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1990년 서훈을 받은 그는 김천에서 태어났으나 대구에서 배우고 태극단의 아픔이 있는 만큼 비록 뒷날 대전에서 살면서도 모교에서 열린 태극단 추모 행사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였고 자연스레 학교의 자랑스러운 졸업생이 됐다. 대전과 대구를 오가면서 옛 단원을 기리며 모교를 잊지 않고 아꼈던 그가 지난 14일 아흔넷으로 눈을 감고 먼저 간 옛 동지들과의 재회의 길을 떠났다.

부디 태극단과 단원의 빛나는 공적과 활동이, 지금 많은 대구 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이 모여 뒷날 모습을 드러낼 대구독립운동기념관에 옛 동료, 뭇 애국 선열과 함께 당당히 오를 때까지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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