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희수의 술과 인문학] 슬픔을 해소시키는 술, 진(Gin)의 유혹

타락한 천사 칵테일
타락한 천사 칵테일

백색의 비단, 위안자, 빈자의 술, 옷을 벗기는 술, 어머니의 타락, 팔방미인이라는 다양한 별칭을 가진 진(Gin)은 오늘날 칵테일의 기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술이다. 19세기 런던의 뒷골목은 술 취한 무뢰한 사람들과 타락한 매춘부들이 비틀거리며 어슬렁거리는 풍경이 다반사였을 만큼, 진의 유혹은 공장 근로자에게 초라함과 낭만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술이었다.

오늘날 수많은 애주가와 세계 최고의 바텐더들이 가장 사랑하는 진은 사실 오랜 시간 서민의 곁에서 때로는 병을 물리치는 약으로, 때로는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는 술이 바로 진이었다. 세계 유명 진의 상표로는 고든스(Gordon's), 봄베이 사파이어(Bombay Sapphire), 탱커레이(Tanqueray), 비피터(Beefeater), 시그램(Seagram's) 진 등이 있다.

진의 창시자는 1660년경 네덜란드 라이덴(Leiden) 대학의 의학박사 프란시스쿠스 실비우스다. 실비우스 교수는 두송자 열매를 담가 소독약으로 사용하다 진을 이뇨 및 해열제로 개발했다. 진은 무색투명의 증류주로 곡물에다 주니퍼 베리(juniper berry)란 노간주 나무의 열매(두송자)를 착미시켜 소나무 향이 나도록 한 것이다. 진(Gin)은 두송(Juniper)을 나타내는 프랑스어 쥬니에브르(Genièvre)에서 온 말로 네덜란드 애주가들이 이 약을 '제네바(Geneva) 와인'이라 부르며 마시곤 했다.

그 후 네덜란드 전역을 휩쓴 제네바 와인은 '진(Gin)'이라는 이름으로 명예혁명 당시 영국에 입성하게 된다. 18세기에 접어들 무렵 영국 정부는 국민에게 자국산 술의 소비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프랑스산 브랜디 같은 수입 주류에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한편, 자국의 진 생산에 대해서는 규제를 풀어주면서 결국 이런 정책은 1700년대의 '진 열풍'을 촉발했다.

이후 영국에서 공정이 서서히 갖추어지게 된 진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미국에서 금주법을 폐지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이 직접 탱커레이 진을 이용해 마티니를 만들어 자축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 사건 이후로 마티니 칵테일은 금주령 폐지 이후 백악관에서 가장 처음 마신 술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됐다.

미국의 유명 가수겸 영화배우 프랭크 시나트라, 미국 코미디의 황제라 불리는 밥 호프, 대통령 존. F 케네디와 같은 유명인사들이 진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을 즐겨 마시며, 진에 대한 사랑은 1950년대 미국 주류 문화를 이끌며 폭발적 성장을 보였다. 이러한 진의 역사를 두고 "진은 네덜란드 사람이 만들었고, 영국 사람이 꽃을 피웠으며, 미국 사람이 영광을 주었다."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진을 베이스로 한 칵테일은 수없이 많다. 전통적으로 진과 드라이 베르무트로 만들어진 칵테일의 제왕이라 불리는 마티니(martini)를 비롯해 김렛(Gimlet), 진 토닉(Gin and tonic), 깁슨(Gibson), 진 피즈(Gin Fizz), 문 리버(Moon River), 네그로니(Negroni), 싱가포르 슬링(Singapore Sling), 톰 콜린스(Tom Collins), 핑크 레이디(Pink Lady), 마지막 말(The Last Word), 타락 천사(Fallen Angel), 브롱크스(Bronx) 칵테일 등이 있다.

18세기 때 영국에서 프랑스산 와인이나 브랜디는 하층민들이 사 마시기에는 너무 비쌌기 때문에 진은 슬픔을 해소시키는 술로 가난한 자들의 술이 되었고, 싸고 독한 술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알코올 중독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다. 천사 같으면서 때론 악마 같은 게 술이다. 계절의 갈피에서 꽃이 피고 지듯 술잔 속에도 후회와 연민과 반성과 행복의 깨달음이 담겨있다.

한 잔의 술은 보약이지만 지나치면 독약이 되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잠시 일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보면 자기 삶의 조화로운 균형이 어떻게 깨져 있는지 분명히 보인다. 때때로 손에서 일을 놓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라고 했다. 오늘은 퇴근 후 분위기 좋은 칵테일 바에서 맛있는 칵테일 한잔으로 여유 있는 휴식의 시간을 가져보자.

이희수 대한칵테일조주협회 회장(대구한의대 글로벌관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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