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경규의 행복학교] 배움은 자신을 밝히는 일

배움은 혼탁한 세상에서도 자신의 마음만으로 삶을 어둠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배움은 혼탁한 세상에서도 자신의 마음만으로 삶을 어둠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신(神)과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아무리 현자(賢者)라 할지라도 신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는 이유는 앎이라는 차이에서 시작될 것이다. 인간은 미래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늘을 살며 삶을 배워간다. 즉 출생과 동시에 학습을 통해 가정과 사회에서 적합한 행동 양식을 배운다.

하지만 이러한 배움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삶에서 조금씩 멀어져 간다. 이번 주 졸업하는 대학생들의 나이가 20대임을 생각한다면, 남은 80년은 배움을 멀리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며 부딪치는 많은 문제를 정답 중심의 교과서에서 찾을 수는 없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세월이 갈수록 교과서적 정답 찾기가 어려워지는 이유는 수많은 경우의 수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결과지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싼 수업료의 실패 경험을 지불하며 삶에서 배워나가고 있다. 소중한 삶에서 밤잠을 설치게 하는 고민과 후회들로 아까운 시간을 빼앗기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꾸준히 공부하는 것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을 준다.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게 되고, 자기만의 세계관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우를 범한다. 북경에서 공부할 때 만리장성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야말로 만 리에 달하는 긴 거리의 성인데도 불구하고 만리장성을 본 이들의 의견은 달랐다.

마치 눈을 감은 채 만진 코끼리가 각기 다른 형태로 인식되는 것처럼, 어떤 이는 팔달령에서 본 만리장성이 산에 있다고 하지만, 동쪽 끝 산해관에 있는 만리장성을 본 이는 바다에 있다 하였다.

배움은 삶의 균형을 맞추게 해준다.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이 배움이다.
배움은 삶의 균형을 맞추게 해준다.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이 배움이다.

배움이 있는 사람은 절대 고집스럽지 않고, 교만하지 않다. 왜냐하면, 신이 아닌 이상,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잘 알기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나이를 더해갈수록 아집과 편견의 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현명한 삶을 살아가는 해답을 바로 논어(論語)에서도 찾을 수 있다.

논어(論語)의 제일 처음 글자가 배울 학(學)으로 시작하는 것으로 볼 때,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삶에 있어 배움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배움은 혼탁한 세상에서도 자신의 마음만으로 삶을 어둠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점이 든다. 페이스북이나 다른 SNS를 가득 채울 소위 말하는 스펙을 더 가지기 위해 보여주기를 위해 공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공부한다는 것, 자신을 돌아보고 삶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보다 남에게 과시하는 성격으로 보일 때가 있다.

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옛날에 공부함이란 자신 영혼을 돕는 데 있지만, 요즘에 배운다는 사람은 남을 위해 한다.

이미 수천 년 전 논어에서 이미 오늘을 예견한 듯한 이 말은 오늘을 되돌아보게 만든다.논어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진정한 공부는 남이 알아주는 공부가 아니다. 어두운 밤에 혼자 있더라도 마음이 밝으면 주위가 밝게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밝혀주는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배움에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 중간고사처럼 시험이 끝나자마자 공부한 내용을 잊어버리는 그런 공부에서 벗어나 스스로에게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배움을 시작하여야 한다.

남이 아닌 나를 위한 참 공부를 할수록 많은 질문이 생겨난다. 나를 둘러싼 문제들에 대한 참다운 해결방법을 찾는다면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고, 이는 배움에 대한 갈증과 궁금증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겪고 질문이 있게 되면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들을 생각하게 된다. 방법을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며 배움이 가능해진다.

이제는 흑백필름으로 기억되는 어릴 적, 한약방 하셨던 할아버지의 약방 다락, 그곳에는 약만 있지 않았다. 환자를 보시고 약을 지으시면서도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할아버지는 손수 좋은 글을 직접 적으셨다. 그 글들을 모아 책으로 내어도 될 만하였지만,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권의 책도 내지 않으셨다. 그 글 중에 기억나는 한 대목 역시 논어의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부지여불온 불역군자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나이가 들수록 배움에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배움에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배움과 가까이한다는 것은 반드시 답을 찾는데 그 근원을 두지 않는다. 공부하면 할수록 질문하는 힘을 갖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해야 어제보다 성숙할 수 있고,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럼, 생각하는 시간은 언제일까? 바로 질문을 하는 그 순간부터이다. 질문(質問)을 한문으로 풀어보면 바탕을 묻는 것이다.

즉 문제의 근원에 대하여 구하는 것이다. 영어 Arrogant라는 단어의 뜻은 교만한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그 어원은 바로 질문이 없는 사람이다. 즉 질문이 없는 사람은 근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는 배움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배움은 삶의 균형을 맞추게 해준다.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이 배움이다. 자신의 지혜, 믿음이 지나치면 다른 사람과 공감할 수 없다. 요즘처럼 얕은 지식으로도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시대는 없었다. 실로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더라도 인터넷을 통하여 질문하고 답을 쉽사리 얻을 때면, 가끔은 사고(思考)를 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쉽게 산다고 해서, 고민이 생겼을 때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도 쉽게 모두 얻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배움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밝힐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해준다.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구애받지도 않는다. 평판은 남들이 만들지만, 품격은 진정한 배움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배움을 체화하고 실행하는 일은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빗물을 담듯이 미리 저장해 놓아야 한다. 아니면 가뭄일 때 해결할 방법이 없다.

최경규
최경규

행복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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