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은 순탄치 않다. 일본과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사생결단하듯 반일(反日) 감정을 폭발시킨다. 반면에 중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어떤 망언을 해도 찍소리도 못한다. 대체 이런 현상의 근원은 무엇일까?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새 왕조를 세웠을 때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조선(朝鮮)'을 국호로 정해주었다. 새로 출범한 조선은 중국인이 동쪽으로 건너와 세운 기자조선의 후예이니 중국의 속국임을 표출하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었다. 새 왕조의 지배계층은 자신들이 중국의 성인 기자(箕子)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조선'이란 국명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때부터 조선은 자주독립국이 아니라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고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으로 철저하게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사대란 강대국 주변에 있는 나라가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외교술이다. 조선 지식층이 사대주의를 선택한 이유는 중국에 비해 인구·경제력·군사력에서 현저히 뒤졌기에 생존 차원에서 선택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큰 나라에 의지하여 살다 보면 그 나라에 정신적으로 예속되는 현상을 피할 수 없다.
조선 지도층의 영혼을 사로잡은 중화(中華)사상은 중국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과 지배의 정당성을 용인하는 관념이다. 이러한 중화사상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사건이 1637년 발생했다. 병자호란을 당해 인조가 삼전도에서 여진족 추장 홍타이지에게 항복한 것이다. 1644년에는 조선이 하늘처럼 우러르던 명나라가 오랑캐 청나라에 멸망했다. 중화 문명을 세상 모든 가치의 상위에 두고 있던 조선 지도층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天地崩坼)" 충격에 빠졌다.
18세기 청나라는 동아시아와 중앙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 이처럼 위대한 세계 제국을 우습게 본 나라는 조선이었다. 그들은 중국은 누린내 진동하는 오랑캐의 땅으로 변했으니 중화 문명을 계승·보존하고 있는 곳은 조선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이때부터 조선의 양반 지도층은 조선을 '동쪽의 주나라', 즉 동주(東周)로 칭했고,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로 자리매김했다. 소중화 조선은 망해 없어진 명 황실을 대신하여 자신들이 명나라 황제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1704년, 숙종은 왕궁(창덕궁) 내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고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 황제 신종(만력제)에게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1749년 영조는 대보단을 중건하고 제사 대상을 명나라 창업자 태조(홍무제),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숭정제)으로 확대했다. 급기야 영조는 1764년 "황조의 일월, 우리 동국이 대명이다(皇朝日月, 我東大明)"라는 글을 인쇄하여 신하들에게 나눠주었다. 조선이 소중화의 벽을 뛰어넘어 명나라 황통을 계승한 중화(중국)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다.

베트남도 조선과 비슷하게 중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며, 한문을 공용어로 사용했고, 과거를 통해 관리를 선발했다. 베트남의 역대 왕조는 중국에 조공을 바쳤지만, 스스로 황제를 칭했고 연호도 독자적으로 사용했다. 중화 문화에 일방적으로 편입된 것이 아니라, 중화 문화의 틀을 가져다 자기 문화의 자양분으로 삼은 것이다.
일본도 중국의 황제 체제를 일본에 옮겨와 천황 중심의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그들도 한자 문화권이었지만 공자묘나 향교, 사당 대신 신사(神社)를 전국에 세웠다. 성씨도 짐승(소)·새·밭·산·강·숲이나 태어난 곳, 사는 곳의 지명을 성으로 썼다.
반면에 조선은 중화 문화를 종족·국가보다 우선했고, 그것을 본받는 것을 동방예의지국의 기본으로 믿었다. 중화 천하 일가에 동참하기 위해 그들은 민족의 시조 단군을 팽개치고 중국 주나라 무왕으로부터 조선 왕으로 책봉 받았다는 중국인 기자(箕子)를 시조로 삼고, 기자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한국 족보의 80%는 시조를 중국에서 온 사람으로 설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이성무, 『대은 변안열 평전』, 글항아리, 2015, 73쪽). 시조가 중국에서 도래했다고 하면 그만큼 권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행세깨나 하는 문중은 자기 시조를 중국에서 온 것으로 족보를 고쳤고, 중화 방식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광범위하게 자행했다. 그들은 중화 천하일가를 이루기 위해 중국식 창씨개명을 자랑스럽게 인식하고 행복해했다. 그 결과 이름만으로는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식민지 시절 일본이 한국인에게 창씨개명을 시행한 이유는 중화적 종법제도가 뿌리내린 조선을 중화권에서 분리하여 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한 시도였다. 한국인들이 일본식 창씨개명을 혐오·저주하는 이유는 그것을 요구한 주체가 '중화 문명'이 아니라, 주자성리학자들이 '왜놈, 쪽발이'라고 멸시하던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조선을 '아버지의 나라' 중화 문명에서 분리시키려 하자 한국인들이 극렬 저항한 것이다.
한국인들이 종교처럼 숭앙하는 것 중의 하나가 '단일민족'이란 순혈주의다. 이것은 여진이나 몽골, 흉노 혈통이 끼어드는 것은 안 되고, 중국 혈통이 끼어드는 것은 영광으로 생각하는 중화 정서가 빚어낸 판타지다. 그 결과 중국인들은 한국은 중국인이 한반도로 건너가 세운 화교국가이며, 한국의 영토는 중국의 영토라는 인식이 뇌에 들어가 박혔다.
지난 2017년 4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발언을 상기하시기 바란다. 이것이 오늘날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한중(韓中) 동조론의 뿌리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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