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3> 1954년 독도대첩

순찰·전투·식량구하던 독도의용수비대 전마선 풍랑에13차례 파손
깔따귀에 몸은 험 투성이,어류·된장국에 변비증으로 항문 헐어
무장 경비선 대파에 일본은 독도우표 우편물 반송으로 보복

1953년 여름 식량이 바닥나자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전마선을 타고 태풍을 피해 독도에 피항 중인 일본 어선에 식량을 구하러 가고 있다. 전마선은 독도 유일 교통 수단으로, 태풍과 풍랑에 13차례나 파손돼 대원들은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기도 했다. 홍순칠 대장 미망인 박영희 여사는 2년 전 홍 대장 유품을 정리하다 이 사진을 발견했다고 했다. 박영희 여사 제공
1953년 여름 식량이 바닥나자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전마선을 타고 태풍을 피해 독도에 피항 중인 일본 어선에 식량을 구하러 가고 있다. 전마선은 독도 유일 교통 수단으로, 태풍과 풍랑에 13차례나 파손돼 대원들은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기도 했다. 홍순칠 대장 미망인 박영희 여사는 2년 전 홍 대장 유품을 정리하다 이 사진을 발견했다고 했다. 박영희 여사 제공

1953년 6월 27일 아침, 또 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2척의 일본 해상 순라선이 독도에 상륙, 한국 어부 6명을 체포해 퇴거를 명하고 전마선(배와 배, 육지 등을 오가는 작은 배) 1척을 나포했습니다. 이들은 "한국이 일본 영토를 침범했다"며 '일본령 죽도(日本領 竹島)' 말뚝까지 박았습니다.(동년 6월 29일 자 매일신문).

황당한 소식에 울릉경찰과 군 직원들은 즉시 독도로 달려가 말뚝을 뽑고 그 자리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독도' 표식을 세웠습니다.

뭍에선 6·25 전쟁통에 정신없는데 독도에선 일본이 정색하고 전쟁을 걸어왔습니다. 1952년 6월 25일 일본 수산시험선이 독도에 첫 상륙하면서 시작된 독도 영유권 말뚝 박기 전쟁. '일본 땅' 말뚝을 뽑고 '우리땅 독도'를 박으면 시멘트가 채 굳기 전 또 뽑히고….

1954년 여름, 동도 정상 초사 옆에서 권총을 차고 독도 앞바다를 응시하는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 박영희 여사 제공
1954년 여름, 동도 정상 초사 옆에서 권총을 차고 독도 앞바다를 응시하는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 박영희 여사 제공

"이러다간 울릉도마저 빼앗기겠다." 울릉 군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6·25 참전 제대 군인 청년들이 홍순칠 대장을 중심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 독도에서 고독한 사투가 시작됐습니다. 말뚝 대신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을 단단히 새기고 전마선 한 척으로 독도를 휘돌았습니다.

전마선은 곧 생명선. 순찰도, 전투도, 식수도, 양식을 구하는 일도 모두 이 작은 목선에 의지했습니다. 풍랑에, 태풍에 부서지고 침몰되길 무려 13차례. 전마선을 잃은 날엔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1953년 여름, 식량이 바닥나자 태풍에 독도로 피항 온 일본 어선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서도 앞 저 전마선은 그 무렵 촬영됐습니다.(2023년 10월 20일 홍순칠 대장 미망인 박영희 여사 증언).

"독도 생활은 빤쯔(팬티)만 입고 수영을 일삼아 마치 20세기 무인도 타잔을 연상케 한다. 식수를 구하려 동도에서 물이 나는 서도까지 수영 끝에 1인 당 3홉(약 540㎖)씩. '깔다귀'라는 인육을 침식하는 벌레에 온몸은 험 투성이며, 된장국과 어류 음식만으로 변비증에 걸려 대원들의 항문이 헐어빠지는…."(1954년 9월 25일 자 매일신문)

홍순칠 대장의 기자회견은 처절했습니다. 도 경찰국과 수비대 월동대책 협의 차 짬을 내 대구에 온 그는 "일본 무장 경비정이 매월 정기적으로 독도를 침범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965년 6월 16일자 매일신문에 실린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 인터뷰 기사. 총 4회에 걸쳐 연재 됐다. 얼굴 사진은 홍순칠 대장.
1965년 6월 16일자 매일신문에 실린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 인터뷰 기사. 총 4회에 걸쳐 연재 됐다. 얼굴 사진은 홍순칠 대장.

1954년 11월 21일, 마침내 큰 일이 터졌습니다. 일본 무장 경비정 세 척이 초소 3백m까지 기어 들어왔습니다. 펄럭이는 일장기에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박격포, 중기관총, 소총 등 화력을 있는 대로 퍼부었습니다. 사즉생의 순간, 경비정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도망쳤습니다.

채 20분도 안돼 이번엔 비행기가 날아와 5, 6회 선회하더니 기관총에 놀라 하늘 멀리 꽁무니 뺐습니다. "사상자 16명에 선체 대파…." 이날 저녁 NHK 방송에선 이런 보도가 흘러나왔습니다.(1965년 6월 23일 자 매일신문 - 홍순칠 대장 인터뷰)

일본은 즉각 엄중 항의했습니다. 앞서 9월 22일, '독도는 분쟁 지역'이라며 국제사법제판소 제소 결정에 이어 이번엔 독도우표가 붙은 우편물이 불법이라며 한국으로 반송하는 보복을 가해 왔습니다. 우리 정부는 알은 채도 하지 않았습니다.

1954년 9월 15일 체신부가 발행한 독도우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 3종에 총 3천만 장이 발행됐다. 매일아카이빙센터
1954년 9월 15일 체신부가 발행한 독도우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 3종에 총 3천만 장이 발행됐다. 매일아카이빙센터

당시 체신부는 그해 9월 15일 서둘러 3종의 독도우표 3천만 장을 찍었습니다. 일본으로 가는 우편물은 월 평균 3만 통. 국민들은 보란듯이 '대한민국 독도' 우표를 붙여 일본 열도 구석구석까지 보냈습니다. 일본의 우편물 반송 보복은 국제사회와 자국 내 반대 여론에 결국 중단됐고,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역시 우리 정부의 불응으로 그해 12월 6일 마침내 없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치열했던 1954년 독도대첩. 독도우표 세례로 열도를 뒤흔든 열혈 국민, 약소국이었지만 지혜를 발휘한 대한민국 정부, 무엇보다 맨몸으로 기꺼이 독도로 달려간 의용수비대의 승리였습니다.

홍순칠 대장 미망인 박영희 여사가 포항 자택에서 앨범에 보관 중인 전마선 등 홍대장의 독도의용수비대 활동 사진과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thk@imaeil.com
홍순칠 대장 미망인 박영희 여사가 포항 자택에서 앨범에 보관 중인 전마선 등 홍대장의 독도의용수비대 활동 사진과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thk@imaeil.com

"날이 새면 보이는 건 푸른바다 푸른하늘뿐, 대원들 입에선 향수의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다. 곰곰히 생각하니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 땅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1965년 6월 22일 자 매일신문). 울릉도로 돌아온 홍순칠 대장은 그날을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내일(25일)은 독도의 날. 6·25 전쟁은 휴전 됐지만 일본이 걸어온 독도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