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는 배신자의 뜻을 가진 단어가 의외로 많다. 흔히 쓰이는 traitor, betrayer 말고도 apostate, collaborator, colluder, defector, fraternizer, renegade, turncoat 등등이 유의어로 사전에 나온다. 종교·민족·영토 문제가 얽히고설킨 영향이 아닐까 싶다.
Quisling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는데 흥미롭게도 원래는 인명이었다. 우리로 치면 을사오적(乙巳五賊)쯤 되는 20세기 노르웨이 정치가 비드쿤 크비슬링이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그에게 히틀러가 진짜 이름을 대라고 윽박지르는 풍자만화도 당시에 있었다고 한다.
설명을 좀 보태자면 크비슬링은 장래가 촉망되던 군인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반공을 기치로 내건 '노르드민족부흥'이란 정당을 만들고, 점차 파시즘에 심취했다. 꼭두각시 수반으로서 나치에 철저히 협력했던 그는 결국 1945년 10월 24일 총살됐다.
요즘 우리 정치판에도 배신자의 동의어가 쏟아지고 있다. '수박'(겉은 더불어민주당 속은 국민의힘)과 '내부 총질'이 대표적이다. 야당 지지자 사이에선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투표에서 찬성 표를 던진 민주당 의원을 겨냥한 '가결 유다(Judas)'란 멸칭도 등장했다.
미국 역시 '배신자' 때문에 국정이 마비될 위기다. 이달 초 권력 순위 3위인 하원 다수당(공화당) 소속 하원의장이 미 의회 사상 처음으로 해임 결의안 투표로 물러났다. 하지만 반란을 주도한 같은 당 강경파의 반대 탓에 아직도 후임 의장을 선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배신자가 넘쳐 나는 것은 정치 실종 시대의 씁쓸한 단면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는 대형 선거를 앞두고 꽤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임에 틀림없다. 한국은 내년 4월에 국회의원 선거를, 미국은 내년 11월에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
당장 이재명 대표의 당무 복귀 이후 행보에 관심이 모인다. 한동안은 통합을 강조하겠지만 친명계와 비명계가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벌여온 만큼 가결파 징계는 어느 정도 불가피해 보인다. 특히 공천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이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지난해 '내부 총질' 징계로 촉발된 여당의 내분 역시 종착점이 궁금하다. 비윤계가 공천에서 불이익을 받게 될지, 분당(分黨)까지 이어질지, 외부 중도 세력과의 연합전선으로 확대될지…. 적어도 거대 정당들의 선택이 총선 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만은 자명하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이후 민생(民生)이 갑작스레 정치권 화두로 떠오른 걸 보면 선거가 다가오긴 했나 싶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유권자들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좌파 진영이든 우파 진영이든 어차피 지키지 않을 공염불임을.
투표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권에 감히 바라는 바는 오직 하나뿐이다. 대한민국을 치유 불가능한 갈등 사회로 더 이상 퇴행시키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적대적 공생(共生)으로 구차하게 연명하는 대신 단 하루라도 국민 상식에 걸맞은 정치를 해 보겠다는 결의를 가져야 한다. 먼 훗날 '시대의 배신자들'이란 오명을 듣기 싫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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