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죽란시사(竹蘭詩社)

박상봉 시인

박상봉 시인
박상봉 시인

살구꽃이 피면 새해 첫 모임을 한다. 복숭아꽃이 피면 꽃에 앉은 봄을 보기 위해 다시 모인다.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여름을 즐기기 위해 한 번 만난다. 그것도 잠시 서늘해지기 시작해 서지(西池)에 핀 연꽃을 완상하기 위해 또 모인다. 가을이 깊어져 국화가 피면 서로 만나 얼굴을 보고, 겨울에 들어 큰 눈이 내리면 다시 만난다. 세밑에 분에 심어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면 모두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해서 술을 마시다 나를 읊을 수 있도록 한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모임에 대한 시를 남긴 이가 누구인지 궁금해 두루 찾아보니, 다산 정약용이 주도했던 열다섯 벗들이 만든 죽란시사(竹蘭詩社)의 모임 규칙이다. 정약용 선생은 집안 정원에 여러 종류의 수목 화초를 심고 사시사철 피어나는 꽃을 감상하기를 좋아해 철마다 벗들을 불러 술과 안주를 대접하고 더불어 시를 쓰며 풍류를 즐겼다. 행여 오가는 벗들에 의해 꽃들이 다칠까 봐 대나무 울타리를 쳤다고 해서 이 모임의 이름이 죽란시사가 된 것이란다. 이 모임에 대한 나름대로 규약이 바로 그 유명한 죽란시사첩(竹欄詩社帖)이다.

정약용의 시문에 나오는 서지(西池)는 서울 서대문 근처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없어진 서련지(西蓮池)를 일컫는 것으로 짐작된다. 죽란시사 벗들은 동이 트기 전 새벽에 모여 서련지에 배를 띄우고 연꽃 틈에 가까이 다가가 귀를 대고는 눈을 감고 숨을 죽인 채 무엇인가를 기다렸다는데, 그것은 바로 연꽃이 필 때 나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고 한다. 꽃잎이 터질 때 연꽃은 청량하고 고운 음색의 미세한 소리를 낸다. 이 소리를 듣기 위해 모여 풍류를 즐기며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해서 술을 마시다가 시를 읊었다고 전한다.

'누가 아들을 낳으면 모임을 마련하고, 벗 중 수령으로 나가는 이가 있으면 만나고, 자제가 과거에 급제하면 그 집에서 잔치를 벌인다.'라는 시문이 이어진 것을 보면 그 시절에도 이른바 정기 모임 말고도, 임시 모임, 즉 요즘 같은 '번개팅'도 있었던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모임을 통해 교유관계를 높이는 것은 삶의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자리로 여겨왔다.

며칠 전 고교 동창들과 화원에서 '미나리 번개팅'을 가졌다. 파릇파릇한 미나리에는 상큼한 봄 향기가 났다. 인디언들의 말에 '친구'란 '나의 슬픔을 등에 진 너'라는 뜻이라고 한다.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그렇게 나의 곁이 되고 진정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벗을 둔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두 손 내밀며 잡아 주는 그런 벗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인생의 자산'이다. 살아온 세월만큼 농익은 벗들을 자주 만나고 싶다. 가슴에 따뜻한 봄빛이 가득 차오르면 좋겠다. 겨드랑이에는 역동적인 봄기운 담은 큼직한 희망의 날개가 돋아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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