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36> 1973년 칠성바위 유적 발굴, 그리고 칠성동

'가문의 번성' 이끌었던 일곱 개 바위 그 아래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북두칠성 떨어지는 꿈 꾼 이태영 본인과 일곱 아들, 높은 벼슬 올라
꿈 속 장소 가보니 바위 7개 발견…집안 경사 모두 이것 덕이라 여겨
2차에 걸쳐 선사시대 지석묘 발굴…고인 돌·석곽·유물도 나오지 않아
삼성그룹·쌍용'경창산업·에스엘…칠성 기운 받아 별이 된 기업 다수

1917년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대구 칠성바위. 위치는 현재 대구콘서트 하우스 자리로, 초기에는 7개의 바위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17년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대구 칠성바위. 위치는 현재 대구콘서트 하우스 자리로, 초기에는 7개의 바위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3년 1월 31일 오전 대구 중구 태평로 2가 1-1번지 시민회관 신축부지에서 칠성바위 유적 발굴이 시작돼 경북대박물관, 문화재관리국 직원들로 구성된 조사반이 발굴에 앞서 지신제를 올리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3년 1월 31일 오전 대구 중구 태평로 2가 1-1번지 시민회관 신축부지에서 칠성바위 유적 발굴이 시작돼 경북대박물관, 문화재관리국 직원들로 구성된 조사반이 발굴에 앞서 지신제를 올리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3년 1월 31일 오전 칠성바위 유적 발굴 조사단이 대구 중구 태평로 2가 1-1번지 시민회관 신축부지에서 제일 먼저 발굴할 바위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3년 1월 31일 오전 칠성바위 유적 발굴 조사단이 대구 중구 태평로 2가 1-1번지 시민회관 신축부지에서 제일 먼저 발굴할 바위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84년 2월 19일 대구시민회관 주차장 옆 소공원(앞쪽)으로 옮겨 온 칠성바위. 칠성바위는 원래 공회당(1931년 준공) 서편에 있었으나 1972년 9월 공회당을 헐고 시민회관을 준공(1975년)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84년 2월 19일 대구시민회관 주차장 옆 소공원(앞쪽)으로 옮겨 온 칠성바위. 칠성바위는 원래 공회당(1931년 준공) 서편에 있었으나 1972년 9월 공회당을 헐고 시민회관을 준공(1975년)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90년대 초 대구시민회관 소공원에 자리한 칠성바위. 찾는 이도 없이 공원 조경석으로 전락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90년대 초 대구시민회관 소공원에 자리한 칠성바위. 찾는 이도 없이 공원 조경석으로 전락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달성(토성)에 올라가니 갑자기 북두칠성이 움직여 하늘을 빙빙 돌다 북문 밖에 떨어졌다. 괴이한 일이다…." 이조(李朝) 중엽, 이태영(李泰永·1744~1803)은 이상한 꿈을 꾼 뒤 아들을 여럿 얻었습니다. 이는 필시 북두칠성의 정기라 믿은 그는 북두칠성에 따라 아들 이름을 지었습니다. 羲甲(희갑)·羲斗(희두)·羲平(희평)·羲升(희승)·羲準(희준)·羲肇(희조)·羲章(희장). 7형제는 자라서 모두 높은 벼슬에 올랐습니다.

이태영도 대구판관(종5품)에서 경상감사(종2품)로. 가문이 번성하자 옛 꿈이 떠올랐습니다. 별이 떨어진 곳을 찾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과연 북두칠성처럼 바위가 일곱 개. 가문의 경사가 모두 이 바위 덕이라 여긴 그는 바위마다 아들 이름을 새기고 사당까지 지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후로 바위는 칠성암으로 불렸습니다. 자식 없는 부인네들 발길이 잇따랐습니다.

1973년 1월 31일, 중구 태평로 2가 1-1번지에서 칠성바위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발굴은 낡은 공회당을 헐어낸 자리에 지을 시민회관 신축에 따른 것. 고고학적으로 칠성바위는 선사시대 지석묘(고인돌). 경북대 박물관과 문화재관리국이 합동으로 조사를 맡았습니다. 먼저 지신제를 올린 뒤 대구시 보호 수목 제1호, 회화나무 아래(동아철강상사 자리) 바위부터 파내려 갔습니다.

"이 지석묘는 2천년 이상 된 것으로 유물 출토 가능성이 있다" 김영하 경북대 박물관장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발굴 이틀째, 2미터 쯤 파 내려가자 해방 전 '義準(의준)'으로 오독했던 '羲準(희준)'이란 이름이 선명히 드러났습니다. 바위를 들어내고 그 아래를 샅샅이 살폈지만 아쉽게도 석곽이나 유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5월 1일부터 나흘 간 실시된 2차 발굴에서는 일부 바위가 교란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공회당 건물과 가까운 바위 2개는 1939년 일본인이 발굴한 적이 있다'던 말 그대로 였습니다. 발굴이 끝났지만 신문 지상에는 이렇다 할 유물도, 지석묘(고인돌)로서 바위(덮개돌)를 고인 돌이나 석곽이 나왔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매일신문 1973년 2월 1일~5월 5일 자)

"처음부터 상석(윗돌) 아래 묘구(墓構)가 없었거나, 상석을 옮겨 왔을 것…." 발굴에 참여했던 경북대 윤용진 교수는 훗날 대구사학(칠성동 지석묘 조사,1977)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또 "칠성바위는 지금까지 지석묘 개념과 달리 새로운 유적 형태로 재고 돼야 할 것" 이라며 "칠성바위는 묘표적 존재, 즉 묘가 없는 무묘거석(無墓巨石)으로 지석묘와 별개로 공존했을 것"이라 했습니다.

인간을 현세에 내려 보낸 곳,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곳, 명을 다해 '돌아가셨다'는 그곳. 그래서 장독대 칠성단에서 정화수(井華水)로 빌던 그곳 북두칠성…. 이태영 감사가 아들 이름을 새기면서부터 이 바위는 더는 '무덤(지석묘)'이 아니었습니다. 가장으로, 경상감사로 가문과 백성의 안녕을 빌었던 영험한 '(북두)칠성 바위'로 거듭났습니다.

이 칠성바위가 있어 이름도 칠성동. 칠성의 기운인지 이 동네서 가업을 일으켜 별(스타)이 된 기업도 많습니다. 삼성그룹, 대성그룹, 쌍용, 경창산업, 평화산업, 에스엘(주), 아세아텍, 지우개를 평정한 (주)화랑…. 이 모두 칠성바위가 자리한 칠성동에서 첫 둥지를 틀었습니다. 칠성바위는 칠성동을 넘어 대구의 보물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동안 칠성바위는 피란촌의 판자촌에, 산업화의 연탄재에, 시끄러운 철길에 숨을 죽여왔습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지하철 대구역 비좁은 뒤뜰보다 북두칠성이 휜히 보이는 대구삼성창조캠퍼스 어디쯤 새 보금자리를 튼다면 다시 별(스타)을 찾는 이들을 구름처럼 불러들일 지도 모를 일입니다.

2025년 2월 지하철 대구역 출구 옆에 자리한 칠성바위. 중구 시민회관 소공원에서 1998년 북구 칠성동 옮겨왔으나 주변 건물에 둘러싸여 존재감을 잃고 있다. 김태형 기자 thk@imaeil.com
2025년 2월 지하철 대구역 출구 옆에 자리한 칠성바위. 중구 시민회관 소공원에서 1998년 북구 칠성동 옮겨왔으나 주변 건물에 둘러싸여 존재감을 잃고 있다. 김태형 기자 thk@imaeil.com
지하철 대구역 출구 옆에 자리한 7개의 칠성바위 가운데 경상감사 이태영의 둘째 아들
지하철 대구역 출구 옆에 자리한 7개의 칠성바위 가운데 경상감사 이태영의 둘째 아들 '이희두' 이름이 새겨진 바위. 김태형 기자 th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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