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토성)에 올라가니 갑자기 북두칠성이 움직여 하늘을 빙빙 돌다 북문 밖에 떨어졌다. 괴이한 일이다…." 이조(李朝) 중엽, 이태영(李泰永·1744~1803)은 이상한 꿈을 꾼 뒤 아들을 여럿 얻었습니다. 이는 필시 북두칠성의 정기라 믿은 그는 북두칠성에 따라 아들 이름을 지었습니다. 羲甲(희갑)·羲斗(희두)·羲平(희평)·羲升(희승)·羲準(희준)·羲肇(희조)·羲章(희장). 7형제는 자라서 모두 높은 벼슬에 올랐습니다.
이태영도 대구판관(종5품)에서 경상감사(종2품)로. 가문이 번성하자 옛 꿈이 떠올랐습니다. 별이 떨어진 곳을 찾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과연 북두칠성처럼 바위가 일곱 개. 가문의 경사가 모두 이 바위 덕이라 여긴 그는 바위마다 아들 이름을 새기고 사당까지 지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후로 바위는 칠성암으로 불렸습니다. 자식 없는 부인네들 발길이 잇따랐습니다.
1973년 1월 31일, 중구 태평로 2가 1-1번지에서 칠성바위 발굴이 시작됐습니다. 발굴은 낡은 공회당을 헐어낸 자리에 지을 시민회관 신축에 따른 것. 고고학적으로 칠성바위는 선사시대 지석묘(고인돌). 경북대 박물관과 문화재관리국이 합동으로 조사를 맡았습니다. 먼저 지신제를 올린 뒤 대구시 보호 수목 제1호, 회화나무 아래(동아철강상사 자리) 바위부터 파내려 갔습니다.
"이 지석묘는 2천년 이상 된 것으로 유물 출토 가능성이 있다" 김영하 경북대 박물관장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발굴 이틀째, 2미터 쯤 파 내려가자 해방 전 '義準(의준)'으로 오독했던 '羲準(희준)'이란 이름이 선명히 드러났습니다. 바위를 들어내고 그 아래를 샅샅이 살폈지만 아쉽게도 석곽이나 유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5월 1일부터 나흘 간 실시된 2차 발굴에서는 일부 바위가 교란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공회당 건물과 가까운 바위 2개는 1939년 일본인이 발굴한 적이 있다'던 말 그대로 였습니다. 발굴이 끝났지만 신문 지상에는 이렇다 할 유물도, 지석묘(고인돌)로서 바위(덮개돌)를 고인 돌이나 석곽이 나왔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매일신문 1973년 2월 1일~5월 5일 자)
"처음부터 상석(윗돌) 아래 묘구(墓構)가 없었거나, 상석을 옮겨 왔을 것…." 발굴에 참여했던 경북대 윤용진 교수는 훗날 대구사학(칠성동 지석묘 조사,1977)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또 "칠성바위는 지금까지 지석묘 개념과 달리 새로운 유적 형태로 재고 돼야 할 것" 이라며 "칠성바위는 묘표적 존재, 즉 묘가 없는 무묘거석(無墓巨石)으로 지석묘와 별개로 공존했을 것"이라 했습니다.
인간을 현세에 내려 보낸 곳,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곳, 명을 다해 '돌아가셨다'는 그곳. 그래서 장독대 칠성단에서 정화수(井華水)로 빌던 그곳 북두칠성…. 이태영 감사가 아들 이름을 새기면서부터 이 바위는 더는 '무덤(지석묘)'이 아니었습니다. 가장으로, 경상감사로 가문과 백성의 안녕을 빌었던 영험한 '(북두)칠성 바위'로 거듭났습니다.
이 칠성바위가 있어 이름도 칠성동. 칠성의 기운인지 이 동네서 가업을 일으켜 별(스타)이 된 기업도 많습니다. 삼성그룹, 대성그룹, 쌍용, 경창산업, 평화산업, 에스엘(주), 아세아텍, 지우개를 평정한 (주)화랑…. 이 모두 칠성바위가 자리한 칠성동에서 첫 둥지를 틀었습니다. 칠성바위는 칠성동을 넘어 대구의 보물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동안 칠성바위는 피란촌의 판자촌에, 산업화의 연탄재에, 시끄러운 철길에 숨을 죽여왔습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지하철 대구역 비좁은 뒤뜰보다 북두칠성이 휜히 보이는 대구삼성창조캠퍼스 어디쯤 새 보금자리를 튼다면 다시 별(스타)을 찾는 이들을 구름처럼 불러들일 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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