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기자·아카이빙센터장 th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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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0> 1961년  대구 물난리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20> 1961년 대구 물난리

    1961년 7월 8일, 대구에 새벽부터 장맛비가 또 맹위를 떨쳤습니다. 신천에 물이 위험 수위를 넘기고도 계속 붇더니 기어이 일을 내고 말았습니다. 이날 오전 10시쯤 신천동 4구(현 수성 4가) 제방이 침식되면서 터졌습니다. 이 일대 저지대 가옥이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신천 푸른다리(경부선) 인근 하상 부락엔 가옥 300호가 어른 허리 깊이로 잠겼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 등에 업혀 간신히 피난하고, 가재도구는 언덕 위 산으로, 지붕 위로 날랐습니다. 상동·범어동·신천동·동인동 일대는 배수가 안 돼 흙탕물로 덮혔습니다. 또 내당동 저지대, 대봉동 이천교 앞, 대명동 영선못(현 영선시장 자리) 아래 재건주택이 침수되고 효성여대(현 효성타운 자리) 서편엔 앞산에서 흘러든 빗물에 제방이 4곳이나 터졌습니다. 북비산 금호강 유역에는 축구장 50개 넓이의 논밭이 물바다로, 원대동 일대 들판도 푹 잠겼습니다. 가창댐은 물이 넘쳐 한없이 토해 내고, 금호강은 위험 수위, 낙동강은 상주·왜관·현풍 모두 홍수 수위를 넘겼습니다. 5관구 군인, 경찰, 소방대원으론 턱없이 부족해 비상 소집된 의용소방대도 팔을 걷었습니다. 복구 장비도 변변찮아 무너진 제방에는 통나무를 때려 박고 삽으로 가마니에 모래를 채워 쌓았습니다. 전날인 7일에는 봉덕동 1구 '사들못' 도랑이 터져 가옥 70여 동이 피해를 봤습니다. 침산국민(초등)학교 어린이들은 도로가 물에 잠겨 등교도 못했습니다. 서문시장은 침수에 누수로 절반이 철시했고, 침산 가설시장엔 손님 대신 흙탕물이 들어찼습니다. 온 들이 물바다로 변한 내당동 5구에서는 피난설까지 돌았습니다. 3일(59.6mm)과 4일(74,6mm), 7일(84.8mm)과 8일(83.7mm) 등 3일부터 8까지 대구에 내린 장맛비는 302.7mm. 가옥 약 1천호가 침수되고 도로와 제방 10여 곳이 무너졌습니다. 신천에선 급류에 지프차가 휩쓸리고, 귀갓길에 아들에게 줄 빵을 사 하천을 건너다, 떠내려 오는 보릿짚을, 또 목재를 건지려다 3명이나 변을 당했습니다. 9일부터 대구에는 비가 잦아들었지만 장마 전선이 북상하면서 영주에서는 12일 밤 시가지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를 겪기도 했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1년 7월 4일~14일 자)〈/strong〉 해마다 이맘때면 가뭄이 아니면 이렇게 물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장맛비는더 난폭해졌습니다. 2024년 올해도 그렇습니다. 대구에선 7월 2일(22.1mm)과 3일(12.4mm) 찔끔 비를 뿌리다 4일에는 폭염(최고 34.8℃)을 보이더니 9일에는 하루 만에 191mm나, 그것도 양동이로 쏟아붓듯 내렸습니다. 지리하게 내리던 장마는 옛일. 언제 어디에 얼마나 내릴 지 슈퍼 컴퓨터의 예측도 비켜가기 일쑵니다. 1961년 그 무렵엔 모든 게 부족해서 그랬다지만, 이수(利水)도 치수(治水)도 이렇게 눈부신데 피해는 외려 더 커졌습니다. 더 높이, 더 많이, 더 편하자고 앞만 보고 달려온 지 60여 년. 그새 장마는 성난 게릴라처럼 괴물로 변했습니다. 지금 자연은 무척 화가 났습니다.

    2024-07-19 05:30:00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9> 1962년 극심한 한발(가뭄)에 물길 찾는 학생들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9> 1962년 극심한 한발(가뭄)에 물길 찾는 학생들

    1962년 6월 29일, 모내기 철 윤기가 흘러야 할 논바닥은 바싹 말라 뽀얀 먼지가 일고, 비만 오면 넘쳐 흐르던 금호강·동강 물줄기도 멈춘 지 오래. 40여 일 계속된 한발(旱魃·가뭄)에 29일 현재 전국 모내기 진척도는 65.6%. 가뭄이 제일 심한 경북은 겨우 35%. 수일 내 비가 안 오면 모가 말라 죽어 비가 와도 모내기를 못할 지경에 처했습니다. "공무원, 학생, 군인, 민간인 등 가능한 손은 모두 동원하라". 이날 중앙한해대책위는 최후의 수단을 긴급 하달했습니다. 모내기가 어려운 곳은 가식(假植), 물이 있는 논에 모를 임시로 심었다가 비가 오면 다시 제 논에 옮겨 심고 이마저도 힘든 곳은 대파(代播), 대체 작물을 심도록 했습니다. "10일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묘판의 모를 없애라" 7월 1일, 거도적 가뭄과의 대결이 시작돼 대구 아양교 하류 금호강에 학생들이 떼로 나왔습니다. 이들은 경상중 1천900명, 대구중 1천500명 등 모두 3천400명. 강물이 말라 멈춘 아양교에서 양수기가 설치된 대구선 철교 부근까지 300m 구간에 바글바글 붙었습니다. 학생들의 작업은 강 오른편 20정보(6만평)의 마른 논에 양수할 물길을 내는 일. 전날 208공병대 그레이더 한 대가 급히 파헤쳐 놓고 간 강바닥에 벌떼처럼 달라붙어 삽질을 해대자 그럴싸한 물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날 공무원과 교사(2천600명)들은 신천 용두방천에서, 공산초(300명)·공산중(200명)·동중(500명) 학생들은 동화천에서, 대륜중·고(900명)·중앙상고(500명) 학생들은 연못과 우물을 파며 물을 찾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4일에는 대대적인 동원령이 내려져 대륜중 1천500여 명이 군인들과 신천 상류 가창 일대 하천을 4km나 파는 등 21개교 9천100여 명이 물을 찾고 모를 냈습니다. 이날까지 동원된 대구시내 학생들은 연 4만300여 명. 시골 학생들은 볼 것도 없었습니다. 경주에선 전국에서 처음으로 '호미모'가 등장했습니다. 물이 없으니 호미로 마른 논에다 흙을 파고 모를 심었습니다. 20일 내에 비가 오면 평년작의 80%는 건질 수 있다 해서 가뭄이 심한 경주 남산리(동) 들판에 4일까지 심은 호미모는 무려 50정보(15만평). 여기엔 경주 초·중학생이 2천300명이나 거들었습니다. 이 무렵 아이들은 삽질에 호미질은 다반사여서 너나없이 한몫하는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러던 4일 밤, 남쪽에서 애먹이던 장마전선이 올라와 비를 뿌렸지만 도내 평균 강우는 겨우 16.2mm. 이틀 후에 또 찔끔 내려 평균 5mm. 농민들 속을 뒤집어 놓더니 마침내 태풍 '죤'이 비구름을 왕창 몰고 왔습니다. 12일 새벽부터 대지가 흠뻑 젖도록 쏟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좋다" 도내 4천281정보(4천200ha)에 심은 가식묘가 본답으로 재이앙되고, 1만265정보(1만ha)의 대파 지역 일부도 갈아엎고 다시 모를 냈습니다. 가뭄으로 망칠뻔 했던 1962년 모내기는 학생들의 손과 태풍 덕에 겨우 마칠 수 있었습니다. 〈strong〉(매일신문 1962년 6월 30일~7월 13일 자)〈/strong〉 한해 전인 1961년 딱 이 무렵(7월 11일), 영주에 200mm가 넘는 폭우에 대홍수가 일어나 인명과 재산을 앗아갔는데 이번엔 태풍이 농민을 살렸습니다. 우연치곤 너무 공교롭고 자연의 희롱이라면 하늘은 너무도 짓궂기만 합니다.

    2024-07-05 05:30:00

  •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경북본부, 2024 통일실천 전진 대회 개최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경북본부, 2024 통일실천 전진 대회 개최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경북 본부(대표 오장홍)는 2일 오후 2시 이경우 대경언론인회 회장, 김규제 삼일보국운동연합 총재, 장수규 맨발걷기 회장 등을 비롯한 통일 지도자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구정책연구원 5층 컨벤션홀에서 2024 통일실천 전진대회를 가졌다. 이날 대회에서 오장홍 대표는 "국내외 정세와 붕괴 직전의 북한 상황 등에 비추어 볼때 통일의 기회가 왔다" 며 " 국난극복의 보루인 대구경북에서 한반도 통일을 앞당기는 대열에 앞장 서자"고 강조했다. 이어 가진 특강에서 서인택 통일천사 중앙의장은 "통일은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한 코리안 드림의 실현" 이라 말하고 광복 80주년이 되는 내년에 한반도 통일을 위한 1천만 캠페인에 시·도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했다.

    2024-07-04 10:49:59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8> 1966년 차바퀴 보리타작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8> 1966년 차바퀴 보리타작

    1966년 6월 16일 대구-하양 간 국도. 배고픈 보릿고개도 어느새 9부 능선. 보리베기가 한창인 6월 중순, 도로에 난데없이 보릿단이 좍 깔렸습니다. 달리는 차량으로 손쉽게 타작하는 이른바 '차바퀴 보리타작'. 이곳을 비롯해 영천, 성서, 화원, 칠곡 등 국도마다 타작하는 농민들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마른 보릿단은 미끄럽기 그지없어 운전자들에겐 살얼음판. 짐 실은 트럭은 엉금엉금, 사람을 태운 버스는 지각 도착이 일쑤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고도 잦아 경찰이 뜨면 보릿단도 팽개치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도리깨질에 비하면 일도 아니어서 농민들은 차바퀴의 유혹을 쉬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작은 억수 같이 비가 내린 3년 전 일이었습니다. 1963년, 삼남지방에 구질구질한 봄비가 그칠 줄 모르더니 끝내 장마로 이어졌습니다. 5월 27일, 봄 강우로 경산 들판엔 쓰러진 보리가 이미 3~5할. 6월 16일부터 시작된 장마에 태풍 '샤리'마저 북상해 25일까지 대구엔 270mm가 넘는 비가 내려 베어 놓은 보릿단이 물에 둥둥 떠다녔습니다. 쉴 새 없는 장대비에 손을 못써 거름 취급 받는 보릿단…. 그래도 건져야 한다고 탁류가 휩쓰는 동촌에선 배를 저어 보릿단을 날랐습니다. "올해 보리농사는 헛농사." 60년 만의 대흉년으로 91만 농민(전 농민의 35%)들이 보리농사를 망쳐 살길이 막막해졌습니다. 도처에서 보리에 수염 같은 싹이 나고 썩어가던 6월 25일, 영천읍(시)과 금호면(읍)에선 군·관·민·학생들이 밤낮없이 도리깨질을 해댔습니다. 영천 탄약사령부가 지원한 조명 발전기로 불을 켜고 철야로 건져낸 보리는 1천500석(1석=10말). 타작한 보리는 아스팔트 도로에 널어 말렸습니다. 비가 오면 걷고 그치면 또 널고…. 국도 십리(4km)길이 보리로 덮혔습니다. 30일 밤, 박경원 경북지사가 영천 타작 현장을 새벽까지 지켜보고는 급히 시장·군수들을 도청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도내 전 포장 도로를 이용해 마지막 순간까지 한 톨의 보리라도 건져야 한다!" 7월 1일부터 '거도적 보리건지기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물에 잠긴 보리도 뜨끈한 아스팔트에선 하루면 충분. 날이 개자 각지에서 철야로 타작이 시작되고 도로마다 보리가 한없이 깔렸습니다. 영천의 기적, 신박한 '국도 아스팔트 건조' 덕에 헛농사라며 낙심했던 1963년 경북도 보리농사는 그래도 평년의 반타작, 76만석은 족히 건질 수 있게 됐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3년 6월,1966년 6~7월)〈/strong〉 이때부터 도로에서 보리 말리기가 시작돼 농민들도 차츰 꾀가 늘었습니다. 바싹 마른 보릿단 위로 차바퀴가 구르자 절로 되는 탈곡…. 힘든 도리깨질을 왜 했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교통량이 늘고 미끄러운 보릿단에 사고도 많아 차바퀴 보리타작은 점차 자취를 감췄습니다. 1966년 경북도 보리수확 예상량은 무려 평년 대비 210%. 조기 파종 등 보리 증산운동에 하늘까지 도와줘 단군 이래 대풍이라 했는데 날벼락이 쳤습니다. 가마당 정부 매입가가 생산비(1천493원)에 턱도 없는 1천5원. 3년 전엔 흉년으로, 이번엔 서글픈 풍년으로 농심은 또 탈탈 털렸습니다.

    2024-06-21 06:01:00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7> 1962년 대구 신천 근로구호공사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7> 1962년 대구 신천 근로구호공사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왜? 필름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 "그래도 엄연한 사실!" 낡은 필름이 계속 말을 걸어왔습니다. 필시 사연이 있을텐데 언제, 무엇 때문에 이토록 운집했는지 알 수 없으니 속이 탔습니다. 필름 속 단서는 대구 앞산 용두바위가 보이는 신천, 장대 높이 내 건 '남산 5구동 근로구호 공사장' 글씨, 옷 차림새는 1960년대. 이렇게 좁히고는 무작정 신문을 훓었습니다. 수년 치를 뒤지고도 제자리. 근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눈이 확 뜨였습니다. 1962년 6월 13일 오전 신천 중동교 부근 근로구호 공사장. 공사 3일째인 이날은 전날 보다 수천 명이 더 늘어 2만2천78명. 강바닥이 사람들로 하얗게 들어찼습니다. 명목은 호안공사였지만 실은 실업자 구호사업. 전년도 큰 물난리로 흉년이 들자 이번 보릿고개가 너무 혹독해 노임으로 당일 쌀을 지급한다니 저렇게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몰린 또 다른 원인은 3일 전 전격 실시된 통화개혁. '환'을 '원'으로, 10대 1로 평가절하되면서 신권이 없어 식량을 못 구한 시민들까지 가세했습니다. 인파에 놀란 강원채 대구시장은 하루 250여 명씩 2개월 간 1만6천명을 취역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바꿔 무제한 일하도록 했습니다. 거의 절반은 부녀자. 10대부터 60대 노인까지, 젖먹이를 업은 부인, 신사숙녀 차림의 젊은 남녀…. 한 세대에서 3, 4명이 나온 곳도 수두룩했습니다. 남편을 잃고 어린 자식 다섯에 일곱 식구를 떠안아 딸과 같이 나온 이정희(53) 씨. 결혼 예물이 적다고 구박하는 시어머니와 불화 끝에 양잿물을 마시고도 죽지 못해 미음을 끓일 쌀을 구하러 왔다는 어느 여인 …. 구호공사는 이들에게 마지막 '지푸라기'였습니다. 작업은 강바닥에서 사리(자갈)를 날라 제방을 쌓는 일. 장비라곤 삽과 괭이, 바구니와 들것이 전부. 모두 맨몸으로 힘을 써야 해서 만삭으로 작업하던 김이남(31·대봉동 5구) 씨는 그만 강바닥에서 불쑥 아기를 분만했습니다. 안타까운 사정에 당국은 쌀 한 가마니로 산모를 긴급 구호했습니다. 엄마 따라 왔다가 손을 놓친 미아도 16명이나 돼 아이를 찾아가라는 순회 방송이 종일 귓전을 울렸습니다. 오후 5시, 일은 끝났지만 워낙 혼잡해 개인별 작업량은 측정 불가. 당국은 군 트럭에 싣고 온 노임곡 930가마니를 풀어 똑같이 쌀 2kg(약 47원)씩 지급했습니다. 3일간 연 취역자는 무려 3만5천여 명. 노임곡이 바닥나 공사가 중단됐습니다. 사흘 뒤, 이번엔 세대 당 1명씩 1천8백80명으로 다시 시작했지만 현장에는 영세민 500여 명이 몰려와 쌀이 떨어졌다며 눈물지었습니다. 〈strong〉(매일신문 1962년 6월 13·14·16·17일 자)〈/strong〉 그때는 먹고 산다는 게 저토록 힘겨웠습니다. 언 62년. 벌거숭이 앞산 자락, 초가삼간, 판자집도 다 옛말. 산천도 신천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그날, 쌀이 없다고 주린 배로 엄마 따라 자갈을 모으던 저 아이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2024-06-07 06:00:00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6> 바다의 보릿고개, 1962년 5월 경북 양포항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6> 바다의 보릿고개, 1962년 5월 경북 양포항

    1962년 5월 중순 경북 양포항. 대풍을 안긴 꽁치도 해류를 쫓아 북으로 달아나고, 다시 한몫 볼 갈치·방어는 한여름은 지나야 해서, 이제 잡히는 건 잡어 뿐. 어한기 5월은 바다에도 보릿고개. 그래도 양포는 낫습니다. 끝물 돌미역 따기가 한창입니다. 주섬주섬 점심을 든 아낙네들이 백사장에 모였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제주에서 온 출가 해녀. 솜씨가 좋다고 불러들인 이들이 물개 마냥 거침없이 미역밭을 누비는 통에 제바닥 해녀들은 한껏 심술이 났습니다. 수심 8m도 거뜬해 당할 재간이 없으니 참 배가 아팠습니다. 옆 동네 감포엔 제주서 온 이들이 무려 191명. 17세 소녀, 서른 아홉 과부, 돌이 겨우 지난 계집을 업고 온 젊은 아낙네도 끼였습니다. 모두 육지 벌이가 나을까 해서 왕복 뱃삯에 반년살이 양식값 등 거금 2만환을 장만해 왔습니다. 품삯은 현물로 1할. 돌미역 열단을 따면 한단을 받았습니다. 백사장에 돌미역이 까맣게 발리고 고깔 같은 띠집, 움막이 여기저기 곤두섰습니다. 해가 지면 움막에 불이 켜지고 작대기에 걸린 남포등이 해풍에 달그랑달그랑 저녁참을 부릅니다. 미역 한오리는 상품(上品)으로 천환, 한단(열오리)이면 만환. 도둑 걱정에 철야로 지킵니다. 울도 담도 없는 백사장이어서 조바심에 뜬눈으로 지샙니다.〈strong〉(매일신문 1962년 5월 21·24일 자)〈/strong〉 움막에서는 미역돌도 지킵니다. 미역돌은 자연산 돌미역이 자라는 미역밭. 이 돌에도 다 임자가 있었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바닷속으로 쭉쭉 뻗은 무형의 바다 두렁이 있어 수확철이면 손을 탈까 서로가 눈 뗄 수 없습니다. 미역 포자가 잘 번지도록 수시로 잠수해 김도 매고 잡초도 뽑습니다. 육지의 밭매기와 다를 바 없지만 숨을 참고 해야 하니 여간 고된 게 아닙니다. 그래도 미역밭은 바다의 옥토. 이 무렵엔 미역돌도 사고 팔아 미역밭을 가졌다면 큰소리 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오막살이 영세민엔 언감생심. 그물을 꿰매는 보망 수선공(하루 노임 6천9백환)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고급 일자리. 대부분 날품으로 미역을 따거나, 종일 그물에 걸린 고기를 떼는 일(하루 노임 9백환)로 밥벌이를 했습니다. 이 배고픈 보릿고개를 넘을라치면 선창에서 고기를 부리다 떨어뜨린 죽은 녀석도 악착같이 건졌습니다. 이날도 엄마는 물고기를 손질해 널어 놓고는 미역을 따러 갔습니다.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엄마가 생각이나 백사장엘 왔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푸른 파도에 까만 갯바위 뿐. 하얀 수건을 두른 엄마는 보이질 않습니다. 한낮 뙤약볕이 저만치 지나도록 대바구니 머리에 인 울 엄마는 오지를 않습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엄마인가 돌아보면 철썩이는 파도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아기는 하릴없이 조약돌을 세다가 기다림에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 노래에 팔을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2024-05-24 06:05:00

  • 경북도 행정동우회  영양 산나물 축제 장보기 행사

    경북도 행정동우회 영양 산나물 축제 장보기 행사

    경상북도 행정동우회(회장 김영재)는 지난 10일 지역 경제 활성화 사업 일환으로 회원 1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영양군 산나물 축제장에서 장보기 사업을 벌였다.

    2024-05-14 13:59:34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5> 아! 선생님…1969년 지산국민학교 범물분교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5> 아! 선생님…1969년 지산국민학교 범물분교

    1969년 어느 봄날 대구 범물동 1118번지(진밭길 409) 지산국민(초등)학교 범물분교.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산골 운동장에 언니 누나 동생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전교생이 함께 하는 예능시간. 노래에 맞춰 손뼉을 치며 예쁜 율동까지, 아이도 선생님도 빙글빙글 함께 돕니다. 오솔길로 오르는 해발 450m, 25세대 140여 명이 사는 옛 화전마을 진밭골. 분교가 없던 6년 전까지만 해도 찬 이슬에 나서던 20리(8km) 등굣길이 하도 험해 못 가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이제는 실컷 늦잠을 자고도 혼날 일이 없습니다. 전교생은 32명. 조경환(33)·서정희(21) 선생님 두 분이 도맡았습니다. 교실은 두 칸. 음악·미술·체육은 다 같이, 나머지는 3개 학년씩 한 교실에서 복식으로 배웁니다. 4학년이 수업하면 5·6학년은 자습하는 돌림식 수업에 가르치고 배우는 게 예삿일이 아닙니다. 더 큰 걱정은 시청각 교육. 칠판에 자동차를 그려 놓고 "부르릉~ 부르릉~" 발동 소릴 흉내 내 보지만 고개만 갸우뚱. 대부분 산중에서 나고 자라 하늘을 나는 비행기는 봤어도 자동차는 본 적이 없습니다. 〈strong〉(매일신문 1969년 6월 6일 자)〈/strong〉 2년 전 부임한 조 선생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6학년인데 글을 모르다니…. "가갸 거겨~~하햐 허혀…." 붙들어 두고 될 때까지 외우고 쓰게 했습니다. 꼬박 한 달 만에 책을 읽더니 재미를 붙였습니다. 2학기부터는 오토바이 출퇴근을 접고 분교 사택에 눌러 앉았습니다. 하숙하며 밤낮으로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박봉을 떼 사준 수련장으로 배우게 하고는 뒤돌아 시험을 쳤습니다. 선생님 말씀은 곧 법. 조 선생님은 더 특별했습니다. 카리스마가 철철 넘쳤습니다. 숙제를 안 해 간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 마주칠 땐 그림자도 피해 다녔습니다. 산중 밤길은 거뜬해도 선생님 눈길은 그렇게도 무서웠습니다. 진학은 생각도 못했는데 가망이 보이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해 중학 시험에 6명 중 5명이 떡 하니 붙었습니다. "이런 선생님이면 되겠다." 학부형들이 선생님을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1년만 근무하면 시내로 돌아간다 했는데 다 틀렸습니다. 내친김에 선생님도 목표가 생겼습니다. 가축을 치고 나무를 길러 교재며 학용품까지 분교에서 해결한다는 자활학교. 끼니를 거르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젖 짜는 양을 키우고 벌통도 들였습니다. 교육청에 때를 써 분교 맞은편 개간하다 만 산 3,300㎡(1천평)을 사들이고는 학부형 손을 빌려 약초를 심고 밤나무를 키웠습니다. 55년이 흐른 지금 그때 그 밤나무는 아름드리로, 분교 자리엔 청소년 수련원이 섰습니다. 수소문 끝에 진밭골 대학생 1호 장윤섭(69·한국안전관리 대표) 씨를 만났습니다. "6학년 때 조 선생님을 만난 게 제 인생의 행운이었지요. 무지의 틀을 깨준 분이셨어요". 그는 그때 인연을 지금껏 잇고 있었습니다. "그래 맞아! 여기서 4년을 근무했지…." 88세 고령에도 조 선생님은 옛 사진을 보자마자 어제처럼 떠올렸습니다. "신명으로 일해야지. 그런 마음으로 지도해야 좋은 학생이 나와…." 선생님은 "다시 태어나도 교단에 설 것"이라 했습니다. 1969년 대한민국 교육의 끝자락 산골 벽지(僻地) 분교. 모든 게 부족해서 더 절실했던 선생님. 시련이었지만 누군가엔 인생의 행운으로 다가왔던 그 이름. 아! 선생님….

    2024-05-10 06:02:00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4> 세계기록유산(끝) 중앙통에서 민주화 꽃피다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4> 세계기록유산(끝) 중앙통에서 민주화 꽃피다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1960년 4월 26일. 운명의 날이었습니다. 오전 10시 27분, 이승만 대통령의 갑작스런 성명에 국회의사당 안팎은 함성과 박수로 뒤덮혔습니다. 데모대는 일순간에 감격의 도가니로, 광화문에서 시청까지 5만 여 군중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 시각 대구도 뜨거웠습니다. 오후 1시, 급히 만든 플래카드를 앞세워 경북대 교수단과 학생 200여 명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국민은 원한다'며 '즉시 하야'를 촉구했습니다. 오후 1시 40분, 교수단이 집결한 대구역 광장은 몰려든 시민들로 달아올랐습니다. "…부산 정치파동, 4사5입 개헌 등 실정(失政)이 도를 넘더니 3·15 부정선거로 민주주의를 도살하고…." 선언문이 끝나자 중앙통(로)으로 질서정연한 데모가 시작됐습니다. 헌병은 길을 트고 연도에선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반월당네거리에 이르러 고병간 경북대 총장의 선창 아래 만세 삼창을 끝으로 해산하나 싶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대구대 교수단은 남문시장 쪽에서, 청구대는 서문로, 도청(현 경상감영공원)을 돌아 구름 인파를 몰고 왔습니다. 3개 대학 교수단과 대학생, 흥분에 휩싸인 중·고교생, 남녀노소 시민들…. 중앙통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기어코 넘어졌구나!" "정말 8·15 같은 기분이다!" 거리에서 다방에서 감격의 대화가 쏟아졌습니다. 물 끓는 듯한 흥분보다 경상도 특유의 깐깐한 노호(怒號), 희열과 환희로 뒤범벅이 된 중앙통을 지나 오후 3시 30분, 군중들이 시청을 포위했습니다. "이(종왕) 시장을 불러내라!" 시장은 간 데 없고 간부들마저 싹 자릴 비웠습니다. 폭동 직전, 사태를 간파한 건 경호를 지휘하던 윤춘근 계엄사무소장. 그는 이 시장을 찾아내 연단에 세우고는 부정선거에 공개 사과토록 했습니다. 이어 윤 소장은 "대구 학생들의 첫 번째 데모(2·28)가 없었던들 마산사건도, 서울사건도, 오늘의 이 승리도 없었을 것"이라며 열변을 토하자 박수가 터졌습니다. 도청에서도 그는 피신한 오임근 지사를 끝내 불러 세웠습니다. "도 행정 책임자로 부당한 상부 명령에 거역할 수 있는 용기 갖지 못해 부끄럽게…." 오 지사도, 이 시장도 사임을 약속하고 가까스로 봉변을 면했습니다. 오후 8시, 어둠이 내리자 지난날 억울하고 분한 마음들이 울컥했습니다. 몽둥이를 든 청소년들이 반공청년단장 신도환 씨 집 가재 도구를 불태우고, 자유당 간부 집을 부수고 다녔습니다. '중파'를 시작으로 남산·덕산·동산·대신·내당·역전 파출까지 "와장창" 돌이 날아들었습니다. "절대 파괴 행동은 삼가라!" 대학생들의 쉰 목소리가 밤이 저물도록 메아리쳤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0년 4월 27일 자)〈/strong〉 "기막히게 긴 세월이었다." "꿈만 같이 너무 빨리 다가온 이 순간…." 이기붕·최인규·이강학·한희석 등 문고리 권력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 그러나 민심은 저토록 대통령을 향했습니다. 마지막 짐은 오롯이 대통령의 몫. 자유당 12년 독재 정권은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마침내 쓰레기 더미에서 민주화의 꽃을 피워냈습니다. 그 시작은 '대구 2·28'이었습니다. 그래서 4월 혁명으로 민권을 되찾기까지 중앙통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불의에 항거하던 거리이자 자유를, 정의를 외치던 '광장'이었습니다. 64년 전 오늘, 격동의 순간을 멈춰 세운 이 사진들은 역사의 산증인이자 세계기록유산. 두고 두고 내일을 비추는 빛나는 거울입니다.

    2024-04-26 06:03:00

  • 엘유엘코리아·애드업, 몽골 시장 진출을 위한 업무 계약 체결

    엘유엘코리아·애드업, 몽골 시장 진출을 위한 업무 계약 체결

    (주)엘유엘코리아(회장 김홍현)과 (주)애드업(대표 이원석)은 25일 대구 신암동 엘유엘코리아 본사에서 몽골 스마트 퍼스널모빌리티(개인 이동수단) 시장 진출을 위한 업무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몽골 도로교통부 2021년 발표에 따르면 최근 10년 동안 수도 울란바타르에는 도로 확충(19% 증가)에 비해 자동차 수(약 78만2천대)가 2.4배 늘어 교통 체증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 이에 따라 양 기업은 몽골 도시 교통난 해결을 위해 국내에서 제작되는 스마트 전기 자전거 등 개인용 이동수단을 공급하기로 했다. 애드업은 지난 3월부터 몽골어 온라인 쇼핑몰을 개설, 운영 중이며 몽골 현지 팝업스토어 아이템으로 퍼스널 모빌리티를 선정해 우수한 한국 제조 제품을 몽골에 공급할 예정이다. 이원석 애드업 대표는 "엘유엘코리아와 협업을 통해 우수한 한국 제조 퍼스널모빌리티가 몽골을 넘어 중앙아시아 5개 국가 등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홍현 (주)엘유엘코리아 회장은 "이번 업무 계약을 계기로 국내 강소기업이 힘을 합쳐 몽골 스마트 퍼스널모빌리티 시장을 선점함과 동시에 기술 강국 한국의 위상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 이라고 말했다 한편 엘유엘코리아는 전기자전거, 전동킥보드, 전동스쿠터의 제조, R&D, 유통, 플랫폼 개발 등을 하는 퍼스널모빌리티 전문기업으로 현재 경북 김천시 소재 대지 16,528㎡(5천평)에 6,611㎡(건평 2천평) 규모의 국내 최대 전기자전거 생산 공장을 건설 중이다.

    2024-04-25 17:13:12

  •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경본부, 코리안 드림 실현 특별 워크숖 개최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경본부, 코리안 드림 실현 특별 워크숖 개최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경북 본부 (대표 오장홍)는 18일 오전 대구 중구 매일빌딩에서 이수만 대경언론인회 사무총장과 회원, 장수규 맨발학교 수성구 지회장 등 1백여 명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참석한 가운데 코리안 드림 실현을 위한 특별 워크숖을 가졌다. 특강에서 서인택 통일천사 중앙의장은 "한반도를 둘러싼 내외 환경 변화와 국제사회의 각종 규제로 북한 경제가 파산 상태에 이르고 있어 통일의 기회가 왔다" 며 "한반도 통일을 위해 국난 극복의 보루인 대구 경북에서 앞장서 줄 것"을 호소했다. 이에 앞서 통일천사 대경본부는 맨발학교 수성구 지회와 MOU를 맺고 내년에 개최될 광복 80주년 맞이 통일 실천 1천만인 캠페인을 함께 하기로 했다.

    2024-04-21 13:14:54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3> 세계기록유산 ④ 중앙통에 혁명 물결 넘치다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3> 세계기록유산 ④ 중앙통에 혁명 물결 넘치다

    19일 오후 3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비장한 목소리로 경북대생 2천여 명이 교문을 나섰습니다. '동포여 궐기하자 잃은 주권 찾기 위해'. 플래카드 아래로 김주열 군 모의 유해가 선두에 섰습니다. 혁명의 그날, 대구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대구공고를 지나자 맞닥뜨린 무장 경찰. 평화행진 합의로 길을 튼 데모대는 동인로타리를 지나 대구역에서 중앙통(로)으로 기수를 틀었습니다. "정부는 마산 사건 책임져라." "민족 체면을 망치지 말라." 양복에 넥타이 핀까지, 대열은 진중했고 함성은 의연했습니다. 까까머리 꼬마부터 중년 시민까지 뒤를 따라 거리는 금세 거대한 물결을 이뤘습니다. 반월당, 남문시장을 돌아 다시 중앙통으로. 오후 4시 45분, 집결지 도청광장(경상감영공원)에 빼곡히 앉아 농성이 시작됐습니다. '…애국가, 교가, 구호 등을 높이 부르며 오임근 도지사의 ********…(檢閱畢).'(〈strong〉매일신문 1960년 4월 20일 자)〈/strong〉 갑자기 신문 기사가 문드러졌습니다. 납 활자가 깍인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검열필(檢閱畢), 계엄군의 보도 검열로 지면마다 군데군데 휑하니 글자가 지워졌습니다. 입틀막에 사초(史草)가, 역사가 사라졌습니다. 그랬습니다. 농성하던 그 시각, 서울엔 총탄이 핑핑 날았습니다. 전날 고려대생 테러에 대학·고교생 수만 명이 뛰쳐나왔습니다. 최루탄, 물대포, 투석전에 공포탄이 난무하더니 급기야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사망자,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부산, 광주까지 악화되자 이날 오후 5개 도시에 비상계엄령이 떨어졌습니다. 경대생이 해산한 중앙통엔 또 청구대(영남대 전신)생이 나섰습니다. 오후 7시 10분, 야간부 남녀 1천500여 명이 어둠과 비와 계엄으로 불안에 잠긴 밤거리를 하염없이 돌았습니다. 해산을 종용하는 헌병·경찰의 총부리, 최루탄, 몽둥이에 끌려가고 도망치고…. 오후 11시 20분, 6명의 연행 학생이 풀려나고서야 대구는 한숨을 돌렸습니다. 이튿날 오전 10시. 대구대(영남대 전신)생 500여 명이 대명동 교문을 나서 중앙통으로 진출하다 20여 명이 잡혀갔습니다. 경북대 의대생 200여 명도 동인로타리로 진출하다 원정 온 경찰에 이리저리 흩어졌습니다. 이날 중앙통은 종일 수많은 군중들로 어수선했습니다. "큰 길로 나오지 말고 들어가라!" 경찰 백차 마이크가 사라지자 흩어졌던 군중들이 다시 떼를 지었습니다.〈strong〉(동 신문 4월 21일 자)〈/strong〉 "사망 115명(서울 97명·부산 11명·광주 7명), 부상 774명." 21일 계엄사령부 발표에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19일 하루 만에 이 많은 사상자가….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동족 상살(相殺)의 참혹한 광경에 통곡하는 바이다" 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23일 재야인사 68명이 '정·부통령 하야, 3·15선거 무효, 재선거'를 촉구했습니다. 국무위원(10명) 전원 사퇴(21일), 장면 부통령 사임(23일), 이기붕 부통령 당선 사퇴(23일), 이 대통령 자유당 총재직 사임(24일). 그러나 민심은 요지부동. 백약이 무효했습니다.〈계속〉

    2024-04-12 06:01:00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2> 세계기록유산③ 부정선거에 분노하다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2> 세계기록유산③ 부정선거에 분노하다

    1960년 3월 15일 오전 7시. "외에엥~~~" 투표 시작 사이렌이 고요한 대구 아침을 흔들었습니다. "자유당 완장 없인 투표장 입장 불가"(동인 3가) "조장 인솔 없는 유권자는 입장 불가"(신천 1구). 투표소마다 동장, 방(반)장이 핏대를 올렸습니다. 신천 4구 투표소(현 중앙고)에선 정체 불명 청년들이 투표 행렬을 찍던 매일신문 기자 카메라를 후려갈겼습니다. 투표 번호를 받지 못해 방장을 찾는 유권자들. 방장 뒤를 따라 대열 지어 입장하는 유권자들…. "하나마나한 선거 왜 하는지…." 곳곳에서 하소연이 터졌습니다. "더 이상 선거 못한다." 오후 4시 30분, 대구 제1구·현풍·칠곡·영양·문경·영덕·청송·예천·안동·월성 등 18곳 민주당부에서 당원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 시각 민주당 중앙당에선 '선거 무효'를 선언했습니다. 오후 5시 20분, 신문 호외가 대구 거리에 깔렸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0년 3월 16일 자 )〈/strong〉 투표는 참으로 기묘했습니다. 4할 사전 투표, 3인조·9인조 공개 투표. 개표장 야당 참관인을 내쫓고 여당표가 80~90% 든 투표함으로 바꿔친 사실도 검찰 수사로 들통났습니다. 3월 초 폭로된 비밀선거지령문 그대로였습니다. 또 투표함을 실은 차가 출발하면 대기 중인 경찰이 가짜 투표함을 똑같은 차에 싣고 슬그머니 개표장으로, 진짜 투표함은 팔공산, 가창 등지서 불태웠습니다. 개표 중 여당표가 너무 많자 여당표 뭉치에 야당표, 무효표를 덧댄 샌드위치식 감표까지 탄로났습니다. 〈strong〉(동 신문 6월 1일 자)〈/strong〉 이승만 86%, 이기붕 77%, 장면 16%. 3·15 정·부통령 선거 전국 득표율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완벽한 관권·부정선거였습니다. 저 멀리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의 이 대통령 당선을 "썩은 승리"라 썼습니다. 투표 날 제일 먼저 무효를 외친 곳은 마산. 성난 시민들이 밤 늦도록 시가지를 휘젓자 경찰이 발포로 맞섰습니다. 총탄에 학생들이 쓰러져간 아비규환의 밤…. 마산은 봄도 비켜갔습니다. 4월 11일, 그토록 찾던 김주열 군이 끝내 마산 부두에서 주검으로 떠오르자 전국이 들끓었습니다. 대구도 들썩였습니다. 데모를 우려한 경찰이 대안동 민주당 경북도당부를 틀어막았습니다. 새끼줄을 쳐 도로를 막고 첩첩이 인간 바리케이트를 쳤습니다. 발 묶인 당원들은 밤새 풍선 삐라를 만들었습니다.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 소리 없는 함성이 빨간 풍선을 타고 아침 하늘을 날았습니다.〈strong〉(동 신문 4월 13일 자)〈/strong〉 4월 18일, 고려대생 4천여 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민주 역적 몰아내자'는 하얀 머리띠가 거리를 달렸습니다. 살얼음판 데모가 끝나 해산하던 오후 7시 25분쯤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몽둥이 든 깡패떼 데모 학생에 테러'. 19일 자 신문마다 대문짝만하게 실렸습니다. 혁명의 수레바퀴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계속〉

    2024-03-29 06:01:00

  • [단독] 이승만 대통령 대구역 선거 연설, 64년 만에 디지털 사진으로 부활

    [단독] 이승만 대통령 대구역 선거 연설, 64년 만에 디지털 사진으로 부활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선거 연설을 기록한 필름이 64년 만에 발견되면서 디지털 사진으로 복원됐다. 필름은 이 대통령이 1960년 3월 5일 진해 별장에서 특별열차로 대구역에 도착, 역 플랫폼에서 가진 역두(驛頭) 연설회를 기록한 36mm 흑백 화상이며 모두 39컷이다. 필름에는 이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 정부 각료 등과 함께 대구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선거 연설 장면, 역에 운집해 대통령을 환영하는 청중 모습 등이 담겨 있다. 이 대통령의 대구역 연설은 3·15 정·부통령 선거 당시 첫 대중 연설이자 마지막 연설로 알려졌다. 85세 고령이던 이 대통령은 직접적인 선거 유세 계획 없이 2월 27일부터 휴양차 진해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2월 28일 일요 등교지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에 대한 친일파 매도 벽보 사건, 부정선거 비밀지령설 등으로 자유당이 수세에 몰리자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긴급 역두 연설회가 열리게 됐다. 1960년 3월 6일자 매일신문 보도에 따르면 약 40분간 열린 대구역 연설회에서 이 대통령은 '남북통일 문제', '대일 외교 문제' 등 '선거' 보다 '외교' 현안에 시간을 더 할애하면서 '동일 정당 부통령 선출'을 강조하며 자유당 이기붕 부통령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이날 이 대통령은 진해 별장에서 특별열차로 이동하면서 밀양역, 대구역, 김천역에서 연설 후 상경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 대통령 선거 연설 필름은 지난해 5월, 2·28 대구학생의거를 비롯한 4·19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됨에 따라 매일아카이빙센터 자료실에서 관련 기록물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이 필름과 함께 2·28 대구학생의거, 3·15 부정선거, 4·19 혁명 등 격동의 현장을 기록한 미 공개 필름 원본도 매일신문이 대거 복원했다. 당시 매일신문 기자들이 대구, 마산, 부산, 서울에 특파돼 현장을 직접 기록한 것으로, 2·28에서 4·19까지 확인된 필름은 모두 300여 컷에 이른다. 주요 사진은 지난 1일부터 격주로 매일신문 지면에 연재 중이다.

    2024-03-15 06:05:00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1> 세계기록유산 ②이승만, 대구역에서 선거 연설하다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1> 세계기록유산 ②이승만, 대구역에서 선거 연설하다

    '대통령 이승만 박사, 부통령 이기붕 선생을 추대하자' '4선 절대 지지' '리 대통령 각하 만수무강'. 장대 높은 플래카드, 태극기 물결….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1960년 3월 5일 대구역은 인산인해였습니다. 대한반공청년단, 교직원, 부인회, 각급 기관에서 삼척동자까지 수만 명이 운집했습니다. 이 대통령을 보려는 인파였습니다. 노장(85세) 이승만은 애당초 연설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 전 선거도 그랬습니다. 2월 27일 자유당 첫 지방유세(대구)날 그는 휴양차 진해 별장으로 갔습니다. 부통령 후보 이기붕도 마찬가지. 건강이 좋지 않아 지방을 순회하는 출마인사가 전부였습니다. 선거유세는 모두 당무위원들이 도맡았습니다. 민주당은 장면 부통령 후보가 직접 뛰었습니다. 대구(2월 28일)·부산(29일)에 이은 전주(3월 2일)·광주(3일)연설 모두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대구 학생데모를 부른 일요등교(28일) 지시가 되레 민주당 유세장를 달궜습니다. 여기에다 장면을 친일파로 매도하려는 '국민복 차림의 장면' 벽보 사건이, 3월 3일엔 경찰의 '선거운동기본요강' 부정선거비밀지령문이 폭로됐습니다. 다급해진 자유당은 전략을 바꿨습니다. 이승만이 직접 등판키로 했습니다. 이른바 진해~서울간 역두(驛頭) 연설회. 진해 별장에서 열차로 이동하면서 역에서 연설한다는 긴급 처방이었습니다. 이날 낮 12시 25분, 우렁찬 만세 소리에 대구역에 특별열차가 도착하고 이 대통령이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우리나라가 제일 급한 일은 남북 통일입니다. 금수강산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놓아야겠는데 우방들은 화평해야 한다 하므로 북진통일을 참고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민족을 다시 노예로 만들 생각을 말고 뺏아간 귀한 국보들을 내놓아야 합니다."〈strong〉(1960년 3월 6일 자 매일신문). 〈/strong〉첫 일성은 '선거'가 아닌 '외교'였습니다. 대선후보라기보다 현직 대통령의 메시지였습니다. "부통령 선거에 자유당에서 이기붕 씨가 좋다고 해서 허락해 주었는데 합심해서 잘 일해 나갈 것입니다". " 자유·민주 두 정당은 서로 원수로 생각지 말고, 서로 싸움만 하면 절단 나는 것은 나라이니 함께 잘 해 나가야…." 의외였습니다. 연설은 초조한 자유당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앞서 2일, 장면 친일파 벽보 사건에 이 대통령은 "일국의 부통령을 그렇게 대접해선 안 된다"며 벽보를 모두 뜯게 했습니다. 또 일요등교 지시도 "잘못"이라며 시정토록 했습니다.〈strong〉(3월 3일 자 동 신문). 〈/strong〉6년 전, '사사오입 개헌'으로 12년째 권력을 쥐고 있는 그였지만 백발 노장의 이날 연설은 시종 담담했습니다. 이 대통령의 대구역 연설은 3·15 정·부통령 선거 첫 연설이자 그의 정치 생애 마지막 선거연설이었습니다. 역두 연설로 한숨 돌린 자유당은 '이기붕 당선' 고삐를 더 잡아챘습니다. 선거일이 임박할수록 곳곳에서 부정선거비밀지령설이 삐져나와 신문 활자로 드러났습니다. 투표일인 3월 15일. 올 것이 오고 말았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계속〉

    2024-03-15 06:05:00

  •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에서 '사진으로 보는 중구 100년' 사진전 …4월 28일까지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에서 '사진으로 보는 중구 100년' 사진전 …4월 28일까지

    대구 중구청(청장 류규하)과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대표 안상호)은 지난 5일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 1층 로비에서 '사진으로 보는 중구 100년' 사진전을 오픈, 4월 28일까지 전시한다. 전시에는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중구의 역사적 장소와 건축물, 거리 풍경, 근현대 생활상 등을 담은 기록사진 1백 여점을 선보인다. 사진은 북성로 도시재생뉴딜사업 일환으로 중구 아카이브 구축을 위해 발굴·수집한 것으로, 매일신문 아카이빙센터에서 제공한 사진과 사진공모를 비롯해 각급 기관, 사진작가 등이 기증한 사진들이다. 이번 사진전은 지난 1월 봉산문화회관 전시에서 이은 두 번째 전시다.

    2024-03-06 14:31:21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0> 세계기록유산① 2·28 대구학생의거 지구촌을 울리다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0> 세계기록유산① 2·28 대구학생의거 지구촌을 울리다

    1960년 2월 28일 오후 대구 수성교 옆 신천에서 열린 민주당 선거유세에 청중들이 몰려 연설을 듣고 있다. 당국의 갖가지 참석 방해에도 학생 등 10만 인파가 모였다. 신천 건너 큰 건물은 남산여고와 신명여중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1960년 2월 28일 오후 1시 5분, 이대우의 당찬 결의문을 신호탄으로 경북고생 8백여 명이 교문을 뛰쳐나와 도청으로 내달렸습니다. 일요등교 지시에, 끝내 봇물이 터졌습니다. 대구 8개 고교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났습니다. 3·15 정·부통령 선거를 꼭 한 달 앞두고 민주당 대선 후보 조병옥(65) 박사의 갑작스런 서거로 현직 대통령이자 자유당 후보 이승만(85) 당선은 따논 당상. 그런데 그의 나이는 85세, 잘못되면 정권이 부통령에 넘어갈 판이었습니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는 현직 부통령인 장면. 자유당은 이기붕 당선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조병옥 박사 국민장(25일) 후 첫 지방유세 장소는 대구. 27일(토) 자유당에 이어 일요일인 28일 민주당 선거연설이 예고되자 25일 당국은 곳곳에 모종의 지시를 하달했습니다. 그것은 일요등교 외 제일모직·대한방직·내외방직 등 대기업은 전원 출근, 2군사령부 예하 전 부대는 체육대회와 노래자랑, 각급 공무원은 줄줄이 출장으로 드러났습니다.〈strong〉(1960년 2월 29일자 매일신문)〈/strong〉 속내를 빤히 알면서도 도리 없던 시절. 걸릴 게 없는 학생들은 달랐습니다.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부수는 것이 우리들의 기백…." 결의문 처럼 거침이 없었습니다. 배운 대로, 행동으로 정의를 외쳤습니다. 대구 학생데모는 29일 전국 뉴스를 넘어 AP통신을 타고 지구 한 바퀴를 휙 돌았습니다. 대구를 보고 전국 학생들이 용기를 냈습니다. 장면 후보 대전 유세 날인 8일 대전고생 1천명이 담장을 넘었습니다. 수업은 끝났는데 연설이 안 끝났다고 계속 붙잡아둔 때문이었습니다. 이틀 후, 대전상고·충주고·청주고·청주농고·수원농고생들이 '학원 자유', 자유당의 3인조 공개투표 취소' 등을 외치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12일엔 부산 동래고, 13일엔 경북 문경고 학생 33명이 '선량한 농민들이여 협잡선거에 속지말자'는 삐라를 뿌리다 잡혀갔습니다. 선거 하루 전 14일엔 포항고, 부산 항도고·부산상고·동래고, 경기도 오산 시골 학생까지 '공명 선거', '학원에 자유'를 외쳤습니다.〈strong〉( 동 신문 3월11일~14일자)〈/strong〉 2·28 대구학생의거는 자유당 정권에선 상상할 수 없던 일대 사건. 해방 후 최초 학생민주운동이었습니다. 단 하루였지만 함성은 지구촌을 울렸고, 그날의 기록은 역사의 증인이 됐습니다. 그날 현장을 지킨 매일신문 사진기자 신현국은 1960년 6월 17일 자필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 기분으론 한 사건도 빼놓지 않고 다 찍어 놓겠다는 것이고, 통쾌감이 절로 났던 것이다…." 그와 함께 배상하, 정재소 기자가 남긴 저 필름과 사진들은 지난해 5월 4·19혁명 기록물과 함께 대구의 두 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됐습니다.

    2024-03-01 06:01:00

  • 천부적 사진쟁이 권정호(향년 86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 24일 숙환으로 별세

    천부적 사진쟁이 권정호(향년 86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 24일 숙환으로 별세

    권정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이 2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0년 6월 9일 매일신문사에 입사,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후 평생 사진기자로서 언론 외길을 걸어왔다. 1986년 사진부장, 1996년 8월 부국장으로 퇴임하기까지 36년 간 한 번도 카메라를 놓은 적이 없었다. 이후 (주)삼한씨원 고문에 이어 광역일보, 경북일보, 대구신문에 몸담았을 때나,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카메라는 분신처럼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언론 현장을 떠난 후에는 (사)한국보도사진가협회 수석 부회장을 지냈다. 고인은 매일신문 기자로 재직하면서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한국측 수행 사진기자(1명)로 선발됐으며, 1985년에는 한국기자 최초로 다윈의 갈라파고스 르포에 이어 남극 세종기지 현장을 생생한 사진으로 취재 보도하기도 했다. 숱한 특종사진도 남겼다.1971년 제8대 총선 당시 청도군 공화당 지원유세장에 술판이 벌어져 한 어린이가 어른 틈에 끼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순간 포착한 '나도 한잔'은 그해 한국신문회관 주관 제9회 한국보도사진전에서 동상을 수상했다. 1972년 경찰의 강압에 거짓 자백해 부인 살해범으로 몰렸던 이정락 씨가 진범이 잡혀 103일 만에 누명을 벗고 통곡하는 '103일 만의 통곡'으로 가작(제11회)을, 1982년 경산 열차추돌사고 현장에서 넋을 잃은 엄마를 붙잡고 울부짖는 어린이를 포착한 '엄마야' 로 영예의 금상(제18회)를 수상하기도 했다. 또 권정호 보도사진전(1967), 남극 사진전(1988), 대구지하철 참사 1주년 추모 사진전(2004) 등 고인은 생전 15차례나 보도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특히 2022년 발간한 권정호 보도사진 62년(사진으로 기록한 역사의 현장) 사진집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사진으로 기록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고 있다. 당시 사진집 축사에서 김정길 대구문화예술진흥원장은 "타고난 천부적 '사진쟁이'로 카메라만 잡으면 비호같다는 감탄을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고 했다. 고인은 생전 언론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88년 체육부장관 올림픽기장 문화상, 2021년 제35회 금복문화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권정호(향년 86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 24일 별세. 영우·녕중·규미 씨 부친상. 빈소=대구 삼덕동 경대병원 장례식장 103호실. 발인 26일(월) 오전 7시30분. 장지= 대구명복공원·안동 와룡 선영. 연락처 010-4053-9767.

    2024-02-24 19:32:44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9> 식량증산② 1964년 김천 경지정리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9> 식량증산② 1964년 김천 경지정리

    "기상(機上)에서 내려다 본 지상은 흡사 바둑판 같기도하고, 선 굵은 남자의 샤쓰(남방)무늬 같기도하다…." 1964년 6월 5일, 마침내 금릉군(현 김천시) 농소면 신촌평야 경지정리 사업이 준공을 봤습니다. 착공(3월 31일) 2개월 여만의 성과. '약진경북'계획에 따른 경지정리 사업 완공 제1호였습니다. 면적은 83정보 5반(약 25만 평). 군비 44만 4천원, 몽리민(蒙利民·지주) 노력 부담 95만 9천원이 투입됐습니다. 굴곡진 농토는 네모반듯해지고 종횡으로 5.4km에 수로와 농로가 생겼습니다. 무엇보다 2모작지가 3배 늘어, 쌀과 보리 등 1천1백42섬을 더 증수하게 됐습니다.〈strong〉(1964년 6월 7일자 매일신문)〈/strong〉 식량증산을 위한 경지정리는 다단계식 개간보다 더 절실했습니다. 시·군·읍·면별 1개소씩 도내 247개 지구에서 일제히 깃발을 올렸습니다. 우선 대상은 1모작 저습지. 측량과 설계가 끝나면 몽리민이 직접 팔을 걷었습니다. 힘이 부치는 작업은 군 부대의 불도저, 토운차(土運車)가 맡았습니다. 왜관 삼청리(6월 17일), 울진 호명리(6월 20일), 점촌 공평리(7월 29일), 금릉(김천) 어모면 중왕리(8월 8일) 등에서 준공 소식이 잇따랐습니다. 1964년 첫 해, 목표량(5천7백정보)을 넘어 5천8백6정보가 반듯하게 정리됐습니다. 특히 55% 이상이 2모작지로 전환돼 5만989톤의 식량을 더 증산하게 됐습니다.〈strong〉(1965년 2월 12일자)〈/strong〉 눈이 휘둥그레진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경북도를 '경지정리 시범도'로 정하고, 그해 2월 전국 지방장관(도지사)을 김천으로 싹 불러 현장을 둘러봤습니다. 시찰 현장엔 저습지 물구덩이서 자란 앙상한 벼뿌리와 경지정리 후 자란 두툼한 벼뿌리가 놓였습니다. "벼도 물을 마시고 싶을 때 마셔야지 노상(매일) 물에 담궈두면 잘 크지않습니다" 김인 경북지사가 이렇게 너스레를 떨자 시종 말이 없던 박 대통령은 그제서야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strong〉(1965년 2월 16일자)〈/strong〉 다음날, 경북 도청에서 열린 지방장관 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이렇게 훈시했습니다. "금년에 중점으로 추진해야 할 일 한가지는 경지정리 사업. 경북의 예를 본보기로 전국적으로 전개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한다…." 경지정리 사업은 그해 식량증산 7개년 계획에 올라타고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60년 만에 다시 찾은 김천 들녘. 선 굵은 남자의 샤쓰 같은 들판은 여전한데 고속도로 사이로 시설하우스가 꽉 들어찼습니다. "그때 배고픈 고통을 지금 사람들은 몰라요" "그 흔한 쑥도 씨가 말라 쑥 뜯으러 20리길을 댕겨 온 적도 있어요." "경지정리 하고나서, 통일벼 심고부터 끼니 걱정을 면했어요…." 평생 고향 농토를 지켜 온 아포읍 제석1리 김정수(90),김태문(75)씨. 옛 사진을 내 밀자 맨입으로 보릿고개를 넘던 한 많은 세월을 줄줄 토해냅니다.

    2024-02-16 06:02:00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8> 식량증산① 1964년 청송 다단계식 개간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8> 식량증산① 1964년 청송 다단계식 개간

    미류나무 늘어선 신작로 옆으로 까마득한 비탈밭. 저 높은 산 허리까지 살뜰이도 일궜습니다. 망건 쓴 촌로가 분뇨 거름을 내는 여긴 어디며, 무슨 사연으로 이 험한 산중에 터를 잡았을까요? 기약 없이 또 신문을 훑었습니다. "남한 인구는 2천6백48만명. 식량은 연 3천8백58만석이 필요한데 생산량은 2천4백47만석뿐. 천4백11만석이 부족하다. 해방 후 18년 동안 주력해온 중농정책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strong〉(1964년 6월 19일자 매일신문) 〈/strong〉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원조로 보릿고개를 넘던 이 무렵, 식량 증산만이 살길이었습니다. 정부는 농업근대화, 경북에선 1964년 '약진경북(躍進慶北)'을 내걸었습니다. 핵심 과제는 경지확장과 경지정리. 농토를 넓히고 면적 당 생산량을 높여 증산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경지확장 대상은 국토의 73%에 이르는 산. 경사도 30도 미만 산지를 골라 대대적 개간이 시작됐습니다. 시·군별, 면별로 지정한 개간지에서 층층으로 축대를 쌓고 전답을 만들었습니다. 첫해 개간 실적은 5천5백22정보(5,476ha). 목표량 5천5백정보를 단숨에 넘겼습니다.〈strong〉(1965년 1월 23일자 매일신문) 〈/strong〉 저 비탈밭도 이 무렵 개간됐습니다. 지금 저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지역도, 번지도 모르고 사진 한 장으로 무작정 찾아 나섰습니다. 빈손으로 보낸 지 수 개월. 틈만 나면 수사하듯 사진을 봤습니다. 담뱃굴과 주택 구조는 경북 북부 스타일, 가로수 그림자를 보면 동북 사면, 그 아래로 지나는 도로, 밭 고랑에 희미한 고추대 그루터기…. 단서를 조합해 봉화,영양,청송 일대 위성지도를 훓었습니다. 낙담하길 수십 번. 그러던 어느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주택 위치, 도로와 밭 모양세가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청송군 진보면 이촌리 산 58-11 일원.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갔습니다. 60년 세월에 담뱃굴은 간데없고 온통 사과밭으로 변했습니다. 이웃은 모두 두어 번씩 주인이 바꼈지만 다행히도 고향집을 지키고 사는 마지막 산증인 장경임(63)씨. "어머 세상에, 저기가 우리집이예요…." "이른 아침 부모님 따라 담뱃잎 따고, 엮고, 굴에 매달고 나서야 학교 엘 갔어요. 풀숲 이슬에 발목이 흠뻑 젖곤 했었는데…." 옛 사진 한 장에 아련한 그시절이 울컥 쏟아집니다. 굶지 않고 살아보자고 1백 계단이 넘도록 괭이로 삽으로 일군 다단계식 개간지. 1960년대를 억척스레 살아온 어머니 아버지들의 주름살 같습니다.

    2024-02-02 0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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