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기자·아카이빙센터장 th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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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경본부, 코리안 드림 실현 특별 워크숖 개최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경본부, 코리안 드림 실현 특별 워크숖 개최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경북 본부 (대표 오장홍)는 18일 오전 대구 중구 매일빌딩에서 이수만 대경언론인회 사무총장과 회원, 장수규 맨발학교 수성구 지회장 등 1백여 명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참석한 가운데 코리안 드림 실현을 위한 특별 워크숖을 가졌다. 특강에서 서인택 통일천사 중앙의장은 "한반도를 둘러싼 내외 환경 변화와 국제사회의 각종 규제로 북한 경제가 파산 상태에 이르고 있어 통일의 기회가 왔다" 며 "한반도 통일을 위해 국난 극복의 보루인 대구 경북에서 앞장서 줄 것"을 호소했다. 이에 앞서 통일천사 대경본부는 맨발학교 수성구 지회와 MOU를 맺고 내년에 개최될 광복 80주년 맞이 통일 실천 1천만인 캠페인을 함께 하기로 했다.

    2024-04-21 13:14:54

  •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3> 세계기록유산 ④ 중앙통에 혁명 물결 넘치다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3> 세계기록유산 ④ 중앙통에 혁명 물결 넘치다

    19일 오후 3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비장한 목소리로 경북대생 2천여 명이 교문을 나섰습니다. '동포여 궐기하자 잃은 주권 찾기 위해'. 플래카드 아래로 김주열 군 모의 유해가 선두에 섰습니다. 혁명의 그날, 대구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대구공고를 지나자 맞닥뜨린 무장 경찰. 평화행진 합의로 길을 튼 데모대는 동인로타리를 지나 대구역에서 중앙통(로)으로 기수를 틀었습니다. "정부는 마산 사건 책임져라." "민족 체면을 망치지 말라." 양복에 넥타이 핀까지, 대열은 진중했고 함성은 의연했습니다. 까까머리 꼬마부터 중년 시민까지 뒤를 따라 거리는 금세 거대한 물결을 이뤘습니다. 반월당, 남문시장을 돌아 다시 중앙통으로. 오후 4시 45분, 집결지 도청광장(경상감영공원)에 빼곡히 앉아 농성이 시작됐습니다. '…애국가, 교가, 구호 등을 높이 부르며 오임근 도지사의 ********…(檢閱畢).'(〈strong〉매일신문 1960년 4월 20일 자)〈/strong〉 갑자기 신문 기사가 문드러졌습니다. 납 활자가 깍인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검열필(檢閱畢), 계엄군의 보도 검열로 지면마다 군데군데 휑하니 글자가 지워졌습니다. 입틀막에 사초(史草)가, 역사가 사라졌습니다. 그랬습니다. 농성하던 그 시각, 서울엔 총탄이 핑핑 날았습니다. 전날 고려대생 테러에 대학·고교생 수만 명이 뛰쳐나왔습니다. 최루탄, 물대포, 투석전에 공포탄이 난무하더니 급기야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사망자, 부상자가 속출했습니다. 부산, 광주까지 악화되자 이날 오후 5개 도시에 비상계엄령이 떨어졌습니다. 경대생이 해산한 중앙통엔 또 청구대(영남대 전신)생이 나섰습니다. 오후 7시 10분, 야간부 남녀 1천500여 명이 어둠과 비와 계엄으로 불안에 잠긴 밤거리를 하염없이 돌았습니다. 해산을 종용하는 헌병·경찰의 총부리, 최루탄, 몽둥이에 끌려가고 도망치고…. 오후 11시 20분, 6명의 연행 학생이 풀려나고서야 대구는 한숨을 돌렸습니다. 이튿날 오전 10시. 대구대(영남대 전신)생 500여 명이 대명동 교문을 나서 중앙통으로 진출하다 20여 명이 잡혀갔습니다. 경북대 의대생 200여 명도 동인로타리로 진출하다 원정 온 경찰에 이리저리 흩어졌습니다. 이날 중앙통은 종일 수많은 군중들로 어수선했습니다. "큰 길로 나오지 말고 들어가라!" 경찰 백차 마이크가 사라지자 흩어졌던 군중들이 다시 떼를 지었습니다.〈strong〉(동 신문 4월 21일 자)〈/strong〉 "사망 115명(서울 97명·부산 11명·광주 7명), 부상 774명." 21일 계엄사령부 발표에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19일 하루 만에 이 많은 사상자가….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동족 상살(相殺)의 참혹한 광경에 통곡하는 바이다" 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23일 재야인사 68명이 '정·부통령 하야, 3·15선거 무효, 재선거'를 촉구했습니다. 국무위원(10명) 전원 사퇴(21일), 장면 부통령 사임(23일), 이기붕 부통령 당선 사퇴(23일), 이 대통령 자유당 총재직 사임(24일). 그러나 민심은 요지부동. 백약이 무효했습니다.〈계속〉

    2024-04-12 06:01:00

  •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2> 세계기록유산③ 부정선거에 분노하다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2> 세계기록유산③ 부정선거에 분노하다

    1960년 3월 15일 오전 7시. "외에엥~~~" 투표 시작 사이렌이 고요한 대구 아침을 흔들었습니다. "자유당 완장 없인 투표장 입장 불가"(동인 3가) "조장 인솔 없는 유권자는 입장 불가"(신천 1구). 투표소마다 동장, 방(반)장이 핏대를 올렸습니다. 신천 4구 투표소(현 중앙고)에선 정체 불명 청년들이 투표 행렬을 찍던 매일신문 기자 카메라를 후려갈겼습니다. 투표 번호를 받지 못해 방장을 찾는 유권자들. 방장 뒤를 따라 대열 지어 입장하는 유권자들…. "하나마나한 선거 왜 하는지…." 곳곳에서 하소연이 터졌습니다. "더 이상 선거 못한다." 오후 4시 30분, 대구 제1구·현풍·칠곡·영양·문경·영덕·청송·예천·안동·월성 등 18곳 민주당부에서 당원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 시각 민주당 중앙당에선 '선거 무효'를 선언했습니다. 오후 5시 20분, 신문 호외가 대구 거리에 깔렸습니다.〈strong〉(매일신문 1960년 3월 16일 자 )〈/strong〉 투표는 참으로 기묘했습니다. 4할 사전 투표, 3인조·9인조 공개 투표. 개표장 야당 참관인을 내쫓고 여당표가 80~90% 든 투표함으로 바꿔친 사실도 검찰 수사로 들통났습니다. 3월 초 폭로된 비밀선거지령문 그대로였습니다. 또 투표함을 실은 차가 출발하면 대기 중인 경찰이 가짜 투표함을 똑같은 차에 싣고 슬그머니 개표장으로, 진짜 투표함은 팔공산, 가창 등지서 불태웠습니다. 개표 중 여당표가 너무 많자 여당표 뭉치에 야당표, 무효표를 덧댄 샌드위치식 감표까지 탄로났습니다. 〈strong〉(동 신문 6월 1일 자)〈/strong〉 이승만 86%, 이기붕 77%, 장면 16%. 3·15 정·부통령 선거 전국 득표율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완벽한 관권·부정선거였습니다. 저 멀리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의 이 대통령 당선을 "썩은 승리"라 썼습니다. 투표 날 제일 먼저 무효를 외친 곳은 마산. 성난 시민들이 밤 늦도록 시가지를 휘젓자 경찰이 발포로 맞섰습니다. 총탄에 학생들이 쓰러져간 아비규환의 밤…. 마산은 봄도 비켜갔습니다. 4월 11일, 그토록 찾던 김주열 군이 끝내 마산 부두에서 주검으로 떠오르자 전국이 들끓었습니다. 대구도 들썩였습니다. 데모를 우려한 경찰이 대안동 민주당 경북도당부를 틀어막았습니다. 새끼줄을 쳐 도로를 막고 첩첩이 인간 바리케이트를 쳤습니다. 발 묶인 당원들은 밤새 풍선 삐라를 만들었습니다.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 소리 없는 함성이 빨간 풍선을 타고 아침 하늘을 날았습니다.〈strong〉(동 신문 4월 13일 자)〈/strong〉 4월 18일, 고려대생 4천여 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민주 역적 몰아내자'는 하얀 머리띠가 거리를 달렸습니다. 살얼음판 데모가 끝나 해산하던 오후 7시 25분쯤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몽둥이 든 깡패떼 데모 학생에 테러'. 19일 자 신문마다 대문짝만하게 실렸습니다. 혁명의 수레바퀴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계속〉

    2024-03-29 06:01:00

  • [단독] 이승만 대통령 대구역 선거 연설, 64년 만에 디지털 사진으로 부활

    [단독] 이승만 대통령 대구역 선거 연설, 64년 만에 디지털 사진으로 부활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선거 연설을 기록한 필름이 64년 만에 발견되면서 디지털 사진으로 복원됐다. 필름은 이 대통령이 1960년 3월 5일 진해 별장에서 특별열차로 대구역에 도착, 역 플랫폼에서 가진 역두(驛頭) 연설회를 기록한 36mm 흑백 화상이며 모두 39컷이다. 필름에는 이 대통령이 프란체스카 여사, 정부 각료 등과 함께 대구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선거 연설 장면, 역에 운집해 대통령을 환영하는 청중 모습 등이 담겨 있다. 이 대통령의 대구역 연설은 3·15 정·부통령 선거 당시 첫 대중 연설이자 마지막 연설로 알려졌다. 85세 고령이던 이 대통령은 직접적인 선거 유세 계획 없이 2월 27일부터 휴양차 진해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2월 28일 일요 등교지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에 대한 친일파 매도 벽보 사건, 부정선거 비밀지령설 등으로 자유당이 수세에 몰리자 이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긴급 역두 연설회가 열리게 됐다. 1960년 3월 6일자 매일신문 보도에 따르면 약 40분간 열린 대구역 연설회에서 이 대통령은 '남북통일 문제', '대일 외교 문제' 등 '선거' 보다 '외교' 현안에 시간을 더 할애하면서 '동일 정당 부통령 선출'을 강조하며 자유당 이기붕 부통령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이날 이 대통령은 진해 별장에서 특별열차로 이동하면서 밀양역, 대구역, 김천역에서 연설 후 상경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 대통령 선거 연설 필름은 지난해 5월, 2·28 대구학생의거를 비롯한 4·19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됨에 따라 매일아카이빙센터 자료실에서 관련 기록물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이 필름과 함께 2·28 대구학생의거, 3·15 부정선거, 4·19 혁명 등 격동의 현장을 기록한 미 공개 필름 원본도 매일신문이 대거 복원했다. 당시 매일신문 기자들이 대구, 마산, 부산, 서울에 특파돼 현장을 직접 기록한 것으로, 2·28에서 4·19까지 확인된 필름은 모두 300여 컷에 이른다. 주요 사진은 지난 1일부터 격주로 매일신문 지면에 연재 중이다.

    2024-03-15 06:05:00

  •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1> 세계기록유산 ②이승만, 대구역에서 선거 연설하다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1> 세계기록유산 ②이승만, 대구역에서 선거 연설하다

    '대통령 이승만 박사, 부통령 이기붕 선생을 추대하자' '4선 절대 지지' '리 대통령 각하 만수무강'. 장대 높은 플래카드, 태극기 물결….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1960년 3월 5일 대구역은 인산인해였습니다. 대한반공청년단, 교직원, 부인회, 각급 기관에서 삼척동자까지 수만 명이 운집했습니다. 이 대통령을 보려는 인파였습니다. 노장(85세) 이승만은 애당초 연설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 전 선거도 그랬습니다. 2월 27일 자유당 첫 지방유세(대구)날 그는 휴양차 진해 별장으로 갔습니다. 부통령 후보 이기붕도 마찬가지. 건강이 좋지 않아 지방을 순회하는 출마인사가 전부였습니다. 선거유세는 모두 당무위원들이 도맡았습니다. 민주당은 장면 부통령 후보가 직접 뛰었습니다. 대구(2월 28일)·부산(29일)에 이은 전주(3월 2일)·광주(3일)연설 모두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대구 학생데모를 부른 일요등교(28일) 지시가 되레 민주당 유세장를 달궜습니다. 여기에다 장면을 친일파로 매도하려는 '국민복 차림의 장면' 벽보 사건이, 3월 3일엔 경찰의 '선거운동기본요강' 부정선거비밀지령문이 폭로됐습니다. 다급해진 자유당은 전략을 바꿨습니다. 이승만이 직접 등판키로 했습니다. 이른바 진해~서울간 역두(驛頭) 연설회. 진해 별장에서 열차로 이동하면서 역에서 연설한다는 긴급 처방이었습니다. 이날 낮 12시 25분, 우렁찬 만세 소리에 대구역에 특별열차가 도착하고 이 대통령이 마이크 앞에 섰습니다. "우리나라가 제일 급한 일은 남북 통일입니다. 금수강산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놓아야겠는데 우방들은 화평해야 한다 하므로 북진통일을 참고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민족을 다시 노예로 만들 생각을 말고 뺏아간 귀한 국보들을 내놓아야 합니다."〈strong〉(1960년 3월 6일 자 매일신문). 〈/strong〉첫 일성은 '선거'가 아닌 '외교'였습니다. 대선후보라기보다 현직 대통령의 메시지였습니다. "부통령 선거에 자유당에서 이기붕 씨가 좋다고 해서 허락해 주었는데 합심해서 잘 일해 나갈 것입니다". " 자유·민주 두 정당은 서로 원수로 생각지 말고, 서로 싸움만 하면 절단 나는 것은 나라이니 함께 잘 해 나가야…." 의외였습니다. 연설은 초조한 자유당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앞서 2일, 장면 친일파 벽보 사건에 이 대통령은 "일국의 부통령을 그렇게 대접해선 안 된다"며 벽보를 모두 뜯게 했습니다. 또 일요등교 지시도 "잘못"이라며 시정토록 했습니다.〈strong〉(3월 3일 자 동 신문). 〈/strong〉6년 전, '사사오입 개헌'으로 12년째 권력을 쥐고 있는 그였지만 백발 노장의 이날 연설은 시종 담담했습니다. 이 대통령의 대구역 연설은 3·15 정·부통령 선거 첫 연설이자 그의 정치 생애 마지막 선거연설이었습니다. 역두 연설로 한숨 돌린 자유당은 '이기붕 당선' 고삐를 더 잡아챘습니다. 선거일이 임박할수록 곳곳에서 부정선거비밀지령설이 삐져나와 신문 활자로 드러났습니다. 투표일인 3월 15일. 올 것이 오고 말았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계속〉

    2024-03-15 06:05:00

  •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에서 '사진으로 보는 중구 100년' 사진전 …4월 28일까지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에서 '사진으로 보는 중구 100년' 사진전 …4월 28일까지

    대구 중구청(청장 류규하)과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대표 안상호)은 지난 5일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 1층 로비에서 '사진으로 보는 중구 100년' 사진전을 오픈, 4월 28일까지 전시한다. 전시에는 189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중구의 역사적 장소와 건축물, 거리 풍경, 근현대 생활상 등을 담은 기록사진 1백 여점을 선보인다. 사진은 북성로 도시재생뉴딜사업 일환으로 중구 아카이브 구축을 위해 발굴·수집한 것으로, 매일신문 아카이빙센터에서 제공한 사진과 사진공모를 비롯해 각급 기관, 사진작가 등이 기증한 사진들이다. 이번 사진전은 지난 1월 봉산문화회관 전시에서 이은 두 번째 전시다.

    2024-03-06 14:31:21

  •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0> 세계기록유산① 2·28 대구학생의거 지구촌을 울리다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10> 세계기록유산① 2·28 대구학생의거 지구촌을 울리다

    1960년 2월 28일 오후 대구 수성교 옆 신천에서 열린 민주당 선거유세에 청중들이 몰려 연설을 듣고 있다. 당국의 갖가지 참석 방해에도 학생 등 10만 인파가 모였다. 신천 건너 큰 건물은 남산여고와 신명여중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1960년 2월 28일 오후 1시 5분, 이대우의 당찬 결의문을 신호탄으로 경북고생 8백여 명이 교문을 뛰쳐나와 도청으로 내달렸습니다. 일요등교 지시에, 끝내 봇물이 터졌습니다. 대구 8개 고교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났습니다. 3·15 정·부통령 선거를 꼭 한 달 앞두고 민주당 대선 후보 조병옥(65) 박사의 갑작스런 서거로 현직 대통령이자 자유당 후보 이승만(85) 당선은 따논 당상. 그런데 그의 나이는 85세, 잘못되면 정권이 부통령에 넘어갈 판이었습니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는 현직 부통령인 장면. 자유당은 이기붕 당선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조병옥 박사 국민장(25일) 후 첫 지방유세 장소는 대구. 27일(토) 자유당에 이어 일요일인 28일 민주당 선거연설이 예고되자 25일 당국은 곳곳에 모종의 지시를 하달했습니다. 그것은 일요등교 외 제일모직·대한방직·내외방직 등 대기업은 전원 출근, 2군사령부 예하 전 부대는 체육대회와 노래자랑, 각급 공무원은 줄줄이 출장으로 드러났습니다.〈strong〉(1960년 2월 29일자 매일신문)〈/strong〉 속내를 빤히 알면서도 도리 없던 시절. 걸릴 게 없는 학생들은 달랐습니다.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부수는 것이 우리들의 기백…." 결의문 처럼 거침이 없었습니다. 배운 대로, 행동으로 정의를 외쳤습니다. 대구 학생데모는 29일 전국 뉴스를 넘어 AP통신을 타고 지구 한 바퀴를 휙 돌았습니다. 대구를 보고 전국 학생들이 용기를 냈습니다. 장면 후보 대전 유세 날인 8일 대전고생 1천명이 담장을 넘었습니다. 수업은 끝났는데 연설이 안 끝났다고 계속 붙잡아둔 때문이었습니다. 이틀 후, 대전상고·충주고·청주고·청주농고·수원농고생들이 '학원 자유', 자유당의 3인조 공개투표 취소' 등을 외치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12일엔 부산 동래고, 13일엔 경북 문경고 학생 33명이 '선량한 농민들이여 협잡선거에 속지말자'는 삐라를 뿌리다 잡혀갔습니다. 선거 하루 전 14일엔 포항고, 부산 항도고·부산상고·동래고, 경기도 오산 시골 학생까지 '공명 선거', '학원에 자유'를 외쳤습니다.〈strong〉( 동 신문 3월11일~14일자)〈/strong〉 2·28 대구학생의거는 자유당 정권에선 상상할 수 없던 일대 사건. 해방 후 최초 학생민주운동이었습니다. 단 하루였지만 함성은 지구촌을 울렸고, 그날의 기록은 역사의 증인이 됐습니다. 그날 현장을 지킨 매일신문 사진기자 신현국은 1960년 6월 17일 자필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 기분으론 한 사건도 빼놓지 않고 다 찍어 놓겠다는 것이고, 통쾌감이 절로 났던 것이다…." 그와 함께 배상하, 정재소 기자가 남긴 저 필름과 사진들은 지난해 5월 4·19혁명 기록물과 함께 대구의 두 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됐습니다.

    2024-03-01 06:01:00

  • 천부적 사진쟁이 권정호(향년 86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 24일 숙환으로 별세

    천부적 사진쟁이 권정호(향년 86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 24일 숙환으로 별세

    권정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이 2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0년 6월 9일 매일신문사에 입사,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후 평생 사진기자로서 언론 외길을 걸어왔다. 1986년 사진부장, 1996년 8월 부국장으로 퇴임하기까지 36년 간 한 번도 카메라를 놓은 적이 없었다. 이후 (주)삼한씨원 고문에 이어 광역일보, 경북일보, 대구신문에 몸담았을 때나,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카메라는 분신처럼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언론 현장을 떠난 후에는 (사)한국보도사진가협회 수석 부회장을 지냈다. 고인은 매일신문 기자로 재직하면서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한국측 수행 사진기자(1명)로 선발됐으며, 1985년에는 한국기자 최초로 다윈의 갈라파고스 르포에 이어 남극 세종기지 현장을 생생한 사진으로 취재 보도하기도 했다. 숱한 특종사진도 남겼다.1971년 제8대 총선 당시 청도군 공화당 지원유세장에 술판이 벌어져 한 어린이가 어른 틈에 끼어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순간 포착한 '나도 한잔'은 그해 한국신문회관 주관 제9회 한국보도사진전에서 동상을 수상했다. 1972년 경찰의 강압에 거짓 자백해 부인 살해범으로 몰렸던 이정락 씨가 진범이 잡혀 103일 만에 누명을 벗고 통곡하는 '103일 만의 통곡'으로 가작(제11회)을, 1982년 경산 열차추돌사고 현장에서 넋을 잃은 엄마를 붙잡고 울부짖는 어린이를 포착한 '엄마야' 로 영예의 금상(제18회)를 수상하기도 했다. 또 권정호 보도사진전(1967), 남극 사진전(1988), 대구지하철 참사 1주년 추모 사진전(2004) 등 고인은 생전 15차례나 보도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특히 2022년 발간한 권정호 보도사진 62년(사진으로 기록한 역사의 현장) 사진집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사진으로 기록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고 있다. 당시 사진집 축사에서 김정길 대구문화예술진흥원장은 "타고난 천부적 '사진쟁이'로 카메라만 잡으면 비호같다는 감탄을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고 했다. 고인은 생전 언론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88년 체육부장관 올림픽기장 문화상, 2021년 제35회 금복문화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권정호(향년 86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 24일 별세. 영우·녕중·규미 씨 부친상. 빈소=대구 삼덕동 경대병원 장례식장 103호실. 발인 26일(월) 오전 7시30분. 장지= 대구명복공원·안동 와룡 선영. 연락처 010-4053-9767.

    2024-02-24 19:32:44

  •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9> 식량증산② 1964년 김천 경지정리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9> 식량증산② 1964년 김천 경지정리

    "기상(機上)에서 내려다 본 지상은 흡사 바둑판 같기도하고, 선 굵은 남자의 샤쓰(남방)무늬 같기도하다…." 1964년 6월 5일, 마침내 금릉군(현 김천시) 농소면 신촌평야 경지정리 사업이 준공을 봤습니다. 착공(3월 31일) 2개월 여만의 성과. '약진경북'계획에 따른 경지정리 사업 완공 제1호였습니다. 면적은 83정보 5반(약 25만 평). 군비 44만 4천원, 몽리민(蒙利民·지주) 노력 부담 95만 9천원이 투입됐습니다. 굴곡진 농토는 네모반듯해지고 종횡으로 5.4km에 수로와 농로가 생겼습니다. 무엇보다 2모작지가 3배 늘어, 쌀과 보리 등 1천1백42섬을 더 증수하게 됐습니다.〈strong〉(1964년 6월 7일자 매일신문)〈/strong〉 식량증산을 위한 경지정리는 다단계식 개간보다 더 절실했습니다. 시·군·읍·면별 1개소씩 도내 247개 지구에서 일제히 깃발을 올렸습니다. 우선 대상은 1모작 저습지. 측량과 설계가 끝나면 몽리민이 직접 팔을 걷었습니다. 힘이 부치는 작업은 군 부대의 불도저, 토운차(土運車)가 맡았습니다. 왜관 삼청리(6월 17일), 울진 호명리(6월 20일), 점촌 공평리(7월 29일), 금릉(김천) 어모면 중왕리(8월 8일) 등에서 준공 소식이 잇따랐습니다. 1964년 첫 해, 목표량(5천7백정보)을 넘어 5천8백6정보가 반듯하게 정리됐습니다. 특히 55% 이상이 2모작지로 전환돼 5만989톤의 식량을 더 증산하게 됐습니다.〈strong〉(1965년 2월 12일자)〈/strong〉 눈이 휘둥그레진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경북도를 '경지정리 시범도'로 정하고, 그해 2월 전국 지방장관(도지사)을 김천으로 싹 불러 현장을 둘러봤습니다. 시찰 현장엔 저습지 물구덩이서 자란 앙상한 벼뿌리와 경지정리 후 자란 두툼한 벼뿌리가 놓였습니다. "벼도 물을 마시고 싶을 때 마셔야지 노상(매일) 물에 담궈두면 잘 크지않습니다" 김인 경북지사가 이렇게 너스레를 떨자 시종 말이 없던 박 대통령은 그제서야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strong〉(1965년 2월 16일자)〈/strong〉 다음날, 경북 도청에서 열린 지방장관 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이렇게 훈시했습니다. "금년에 중점으로 추진해야 할 일 한가지는 경지정리 사업. 경북의 예를 본보기로 전국적으로 전개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한다…." 경지정리 사업은 그해 식량증산 7개년 계획에 올라타고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60년 만에 다시 찾은 김천 들녘. 선 굵은 남자의 샤쓰 같은 들판은 여전한데 고속도로 사이로 시설하우스가 꽉 들어찼습니다. "그때 배고픈 고통을 지금 사람들은 몰라요" "그 흔한 쑥도 씨가 말라 쑥 뜯으러 20리길을 댕겨 온 적도 있어요." "경지정리 하고나서, 통일벼 심고부터 끼니 걱정을 면했어요…." 평생 고향 농토를 지켜 온 아포읍 제석1리 김정수(90),김태문(75)씨. 옛 사진을 내 밀자 맨입으로 보릿고개를 넘던 한 많은 세월을 줄줄 토해냅니다.

    2024-02-16 06:02:00

  •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8> 식량증산① 1964년 청송 다단계식 개간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8> 식량증산① 1964년 청송 다단계식 개간

    미류나무 늘어선 신작로 옆으로 까마득한 비탈밭. 저 높은 산 허리까지 살뜰이도 일궜습니다. 망건 쓴 촌로가 분뇨 거름을 내는 여긴 어디며, 무슨 사연으로 이 험한 산중에 터를 잡았을까요? 기약 없이 또 신문을 훑었습니다. "남한 인구는 2천6백48만명. 식량은 연 3천8백58만석이 필요한데 생산량은 2천4백47만석뿐. 천4백11만석이 부족하다. 해방 후 18년 동안 주력해온 중농정책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strong〉(1964년 6월 19일자 매일신문) 〈/strong〉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원조로 보릿고개를 넘던 이 무렵, 식량 증산만이 살길이었습니다. 정부는 농업근대화, 경북에선 1964년 '약진경북(躍進慶北)'을 내걸었습니다. 핵심 과제는 경지확장과 경지정리. 농토를 넓히고 면적 당 생산량을 높여 증산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경지확장 대상은 국토의 73%에 이르는 산. 경사도 30도 미만 산지를 골라 대대적 개간이 시작됐습니다. 시·군별, 면별로 지정한 개간지에서 층층으로 축대를 쌓고 전답을 만들었습니다. 첫해 개간 실적은 5천5백22정보(5,476ha). 목표량 5천5백정보를 단숨에 넘겼습니다.〈strong〉(1965년 1월 23일자 매일신문) 〈/strong〉 저 비탈밭도 이 무렵 개간됐습니다. 지금 저곳은 어떻게 변했을까. 지역도, 번지도 모르고 사진 한 장으로 무작정 찾아 나섰습니다. 빈손으로 보낸 지 수 개월. 틈만 나면 수사하듯 사진을 봤습니다. 담뱃굴과 주택 구조는 경북 북부 스타일, 가로수 그림자를 보면 동북 사면, 그 아래로 지나는 도로, 밭 고랑에 희미한 고추대 그루터기…. 단서를 조합해 봉화,영양,청송 일대 위성지도를 훓었습니다. 낙담하길 수십 번. 그러던 어느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주택 위치, 도로와 밭 모양세가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청송군 진보면 이촌리 산 58-11 일원.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갔습니다. 60년 세월에 담뱃굴은 간데없고 온통 사과밭으로 변했습니다. 이웃은 모두 두어 번씩 주인이 바꼈지만 다행히도 고향집을 지키고 사는 마지막 산증인 장경임(63)씨. "어머 세상에, 저기가 우리집이예요…." "이른 아침 부모님 따라 담뱃잎 따고, 엮고, 굴에 매달고 나서야 학교 엘 갔어요. 풀숲 이슬에 발목이 흠뻑 젖곤 했었는데…." 옛 사진 한 장에 아련한 그시절이 울컥 쏟아집니다. 굶지 않고 살아보자고 1백 계단이 넘도록 괭이로 삽으로 일군 다단계식 개간지. 1960년대를 억척스레 살아온 어머니 아버지들의 주름살 같습니다.

    2024-02-02 06:05:00

  •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7> 1970년대 동촌 금호강 스케이트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7> 1970년대 동촌 금호강 스케이트

    1970년 1월 20일 오전 10시 대구 동촌 금호강 특설 링크. 이른 아침부터 관중들이 몰려들더니 어느새 수천 명. 구름다리에서 케이블카(삭도)까지 강변을 까맣게 메웠습니다. 오늘은 제2회 경북신인빙상경기대회 날. 8세 꼬마부터 56세 흰머리 노장까지 초·중·고·일반부 남녀 선수 185명이 빙판 위에 섰습니다.(〈strong〉1970년 1월 21일자 매일신문〈/strong〉) "준비~ 탕!!" 화약 냄새가 무섭게 은빛 칼날이 간지나게 달립니다. 빵모자에 벙어리장갑이면 완전 무장. 무논에서, 냇가에서, 저수지에서 갈고 닦았는데 우둘투둘한 빙질에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탄성과 환호성으로 오랜만에 동촌에 큰 구경거리가 났습니다. 아침 기온은 영하 3℃. 해가 뜰 수록 얼음이 녹아 경기는 서둘러 12시쯤 끝이 났습니다. 썰매는 몰라도 고급진 스케이트는 아무나 탈 수 없는 것. 기록은 저조했지만 선수들은 의기양양했습니다. 신인 발굴을 위한 이 대회는 매일신문사, 경북빙상경기연맹 공동 주최로 열렸습니다. 제1회(1969년 1월 23일)때부터 이곳에서 치렀습니다. 적당한 강 수위에 넓디넓은 빙판은 고무 마커 깃발만 꽂으면 그대로 특설 링크가 됐습니다. 그러나 대회는 이상난동으로 빙질이 나쁜대다 전국대회 일정이 겹쳐 4년(1971년~74년)간 중단됐습니다. 이후 실내스포츠센터가 생기면서 동촌에서 열리는 경기는 1975년(제3회), 1976년 제4회 대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대회는 중단됐지만 동촌은 갈수록 붐볐습니다. 1977년 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소한(小寒)인 1월 5일 대구 최저 기온은 영하 10.3℃. 삼한사온(三寒四溫)도 없이 한파가 11일 이나 몰아치자 빙판은 더 신이 났습니다. 오뎅(어묵) 파는 구멍가게, 스케이트 빌려주는 상인, 숫돌로 칼날 세우는 아저씨 모두 대목을 만났습니다. "영하 7~8℃의 강추위에도 스케이터들의 심장은 화덕보다 뜨겁다. 코흘리개 어린이부터 흰머리 노년층까지 빽빽이 몰려, 빙판의 곡예는 서투른 멋으로 폭소를 자아내는가 하면 기막힌 묘기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strong〉1977년 1월 25일자 매일신문〈/strong〉)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그랬습니다. 손등이 부르트고 발가락이 시리도록 빙판을 뒹굴었습니다. 추위는 무슨, 병원도 모르고 얼름판 위를 뛰어놀았습니다. 1970년대 겨울 동촌 금호강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스케이트를 즐기던 모두의 놀이터였습니다. 그런데 한겨울이 지나가는 지금, 금호강은 도무지 얼 생각이 없습니다.

    2024-01-19 06:30:00

  •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6> 1964년 하늘에서 본 대구, 지금은?

    [김태형 기자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6> 1964년 하늘에서 본 대구, 지금은?

    누런 봉투에 묵직하게 든 1960년대 필름 뭉치. 반세기를 훌쩍 넘겨서야 먼지를 털고 마주했습니다. 루뻬(확대경)속에 보이는 찰나의 순간들. 알 듯 말 듯 아스라한 필름 속을 헤메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늘을 날며 기록한 지난 날의 대구였습니다. 언제, 왜 찍었을까? 1960년 초 신문부터 몇 년치를 훓었습니다. 계절이 바뀌도록 의문을 풀지 못했습니다. 되돌아 갈 순 없지만 추억이 생생한 사진만으로도 값진 기록. 그때를 찬찬히 들여다봤습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너머 멀리 달성공원에 어렴풋이 보이는 건 일제가 남긴 대구신사 건물(현 물개 사육장 부근). 1966년 8월 13일 대구신사 건물이 헐리기 전 이곳엔 한때 단군 성전이 자리하기도 했습니다. 한옥 사이로 우뚝한 서현교회는 1957년 착공 후 수 년째 건축 중으로, 확인 결과 종탑을 올리기 전 1964년 경 모습으로 밝혀졌습니다. 1964년 대구는 중앙통(로) 일대만 벗어나면 사방이 초가와 한옥 일색이었습니다. 앞산 자락엔 다랑논과 과수원이, 수성들엔 드넓은 파밭이 장관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도시민이지 땅 한 뙈기 없는 사람들은 돈벌이를 찾아 이곳 저곳을 떠돌았습니다. 너나없이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게 제일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딱 저 무렵 전태일이 그랬습니다.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1962년 8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남산동 단칸 셋방에서 무려 여섯식구와 함께 살았습니다. 효성여고(현 천주교 교육원) 운동장 끝자락에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고향집. 예나 지금이나 그대롭니다. 1964년은 또한 이윤복의 시대였습니다. 당시 윤복이는 명덕국민(초등)학교 4학년. 그는 노름에 빠진 아버지와 집 나간 어머니를 대신한 소년가장이었습니다. 신문과 껌을 팔아 동생 셋을 돌봤습니다. 틈틈이 쓴 그의 일기장은 각본이 돼 1965년 개봉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가난이 원수였습니다. 교육만이 살길이었습니다. 당시 동네마다 제일 큰 건물은 성당과 교회 그리고 학교. 재건운동이 한창이던 이 무렵 이들은 신문물로, 교육으로 근대화를 이끌었습니다. 시골 수재들은 너나 없이 대구로 몰려왔습니다. 대구는 이때부터 교육도시였습니다. 대봉동 경북고(현 청운맨션 자리) 옆 굴뚝이 높은 건물은 1919년 일본인이 세운 편창제사(현 대봉태왕아너스 일대). 누애고치로 명주실을 뽑는 공장으로, 이 때는 한국인이 운영했습니다. 편창제사 부지는 무려 2만5천평(약 8만3천㎡). 편창제사와 함께 조선제사, 대구제사 등 대구에서 생산한 수량은 전국 생산량의 38%. 섬유도시 명성도 이때부터 자자했습니다. 60년 세월도 어제 처럼 휙 지났습니다. 그렇게 컸던 학교, 성당, 교회는 빌딩 숲에 쏙 파묻혔습니다. 이제는 매일매일 다이어트 하는 게 큰 걱정거리가 됐습니다. 전태일, 이윤복이 지금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빛 바랜 사진속에 멈춘 1964년 대구. 배고팠던 그 시절 아련한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납니다.

    2024-01-05 06:30:00

  • 현대사진영상학회, 2023 국제 사진영상전 '새로운 사진의 이미지' 전…24일까지 대구 봉산문화회관서

    현대사진영상학회, 2023 국제 사진영상전 '새로운 사진의 이미지' 전…24일까지 대구 봉산문화회관서

    한국 사진의 학문적 현대화에 힘써온 현대사진영상학회(회장 정훈) 주최 2023 국제 사진영상전시 '새로운 사진의 이미지(New Photographic Image)' 전이 대구 봉산문화회관 1, 2 전시관에서 20일부터 24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디지털 이미징 기술 고도화 및 AI 기반 이미지 생성 테크놀로지 출현에 따라 변화하는 사진과 영상 이미지의 양태를 점검하는 주제 섹션, 사진예술 담론에 관한 표현 양상을 조망할 수 있는 일반 섹션으로 나눠 전시한다. 전시에는 유럽과 미주, 아시아 등 15개 국가에서 역량 있는 사진영상 예술가 60여 명이 작업한 사진과 영상 100여 점을 선보인다. 특히 자신의 작품이 생성형 AI를 이용한 이미지라는 점을 밝히며 2023년 소니 월드 포토그래피의 크리에이티브 부문 수상을 거부했던 보리스 엘다크젠(Boris Eldagsen)이 참여한다. 또 동남아시아 각국의 문화적 현상을 엿볼 수 있는 싱가포르(Ore Huiying)와 방글라데시(Samsul Alam Helal), 베트남(Subi Le) 작가 등 국제적인 사진영상 예술가들도 다수 참여한다. 한국의 중견 작가와 20대 중후반의 잠재력 넘치는 젊은 사진영상 예술가도 대거 참여해 전시 주제인 '새로운 사진의 이미지'에 관한 담론의 지평을 넓힐 예정이다. 정훈 현대사진영상학회장(계명대 사진미디어전공 교수)은 "시간을 저장하는 기술적 측면이 강조되었던 과거 사진과 달리 오늘날 사진은 점차 시간성에 관한 의식의 종합을 비추는 매체의 존재론적인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며 "이번 전시는 미디어 간 호환성의 극대화와 함께 사진의 미래 지향적인 예술적 표현 가능성과 한계를 살펴보는 자리로 준비했다" 고 말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24일은 오후 5시까지)다. 21일 오후 2시 30분에는 전시장에서 '사진의 인터미디어 역량'을 주제로 미국 작가이자 큐레이터인 베로니카 시마노프스카야(Veronica Shimanovskaya)와 함께 오픈 대담도 열린다. 이번 국제 사진영상전은 현대사진영상학회가 주최,주관하고 대구문화예술위원회와 대구광역시의 후원 및 월간사진, ㈜ 신지스튜디오클럽이 협찬한다.

    2023-12-21 13:47:03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5>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5> "우리는 개척자다" 1962년 경북선 국토건설단

    1962년 4월 10일, 오늘은 국토건설단 편입식이 열린 날. 대구종합운동장(현 시민운동장)에 장정 1천4백98명이 소집됐습니다. 이들은 태백산지구 국토개발을 위해 경북선 연장구간 노반 공사에 투입될 요원들입니다. 재건의 깃발이 드높던 1962년 일꾼이 부족하자 '혁명정부'는 궁리 끝에 군 미필자, 실업자를 끌어모아 그해 2월 국토건설단을 창단했습니다. "12개월만 고생하면 병력 기피 빨간 딱지를 떼 주겠다". 창단 첫해 전국에서 무려 2만여 명이 몰렸습니다. 농사꾼, 회사원, 교사, 약사, 고등고시 1차 합격자까지. 부양 가족이 딸린 대졸 아빠도 수두룩했습니다. 단화, 모자, 푸른 단복으로 갈아 입은 모습은 영락없이 늘그막에 군대 끌려가는 신병 신세였습니다. 아빠를 보내는 꼬마들의 행렬, 꼬마를 안고 볼을 부비는 아빠, 짧은 이별에도 울먹이는 연인들, 그리고 하얀 저고리의 어머니, 어머니들…. 환송식이 끝나고 건설단은 2군 군악대의 노란샤스 입은 사나이, 아리랑 변주곡을 들으며 특별열차를 타고 영주로 떠났습니다.(1962년 4월 11일자 매일신문) 경북선 연장 구간((점촌~예천~영주·58.6km) 노반공사는 국토건설단 제5지단이 도맡았습니다. 5지단 4천5백73명 중 대구경북 출신자는 3천6백15명. 관리자(기간요원)는 모두 예비역 장교. 건설단은 군법이 적용되는 군대 조직으로 편성됐습니다. 영주에서 막사 생활을 한지 수 개월째. 태백산지구 광산 물동량을 처리할 새 철도기지(현 영주역 주변) 노반 공사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이 일대는 서천이 수시로 범람하던 무논 들판. 1961년 7월 대 홍수 땐 통째로 물바다가 됐던 곳입니다. 개인 장비는 1인 당 삽 한 자루, 3명 당 곡괭이 하나에 질통 1개. 이 장비로 산을 밀고 언덕을 깍아 리어커로, 광차로 흙을 실어 저지대 노반을 다졌습니다. "우리는 개척자다" 5지단 슬로건 그대로 건설단은 산을 옮겨 철도기지를 건설하는 개척자였습니다. "너무 고되서 말할 힘도 없다. 불도저가 할 일을 삽질로 하고 있으니 병이 날 정도다. 뙤약볕에, 힘든 노동에 단원들은 모두 깜둥이, 홀죽이로 변했다….'(1962년 7월 8일자 매일신문). 식사 시간 만큼은 코리언 타임이 없었습니다. 밥은 늘 부족해 삽질 몇 번이면 또 그놈의 허기가 찾아와 배고프다 했습니다. 외출이 허용된 주말이면 너나 없이 노임을 쪼개 빵과 술로 배를 채웠습니다. 공사장 인근에 새 기와집으로 문을 연 음식점은 6개월 만에 본전을 다 뽑았습니다. 막사는 금녀의 집. 수시로 옷이 헤져 밤마다 바느질로 바빴습니다. 유독 심한 가뭄에 농촌 출신 단원들은 농삿일 걱정에 잠을 설쳤습니다. 그러던 10월 어느날 건설단 해체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간 문제도 많았던 터. 무엇보다 단원 대부분이 허약 체질에 고된 일로 환자(늑막염)가 속출했습니다. 의사가 진단을 내리고 쉬게 해도 현장에선 거절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현역병에 준하는 제약, 군법 적용, 장비 부족, 실적 저조, 부실한 급식과 겨울철 난방 걱정….(1962년 11월 14일자 매일신문) 11월 30일, 국토건설단은 소집 7개월 만에 전격 해체됐습니다. 12월 19일 국토건설단 설치법도 폐지됐습니다. 이듬해부터 공사는 문경, 예천, 영주지역 주민을 동원해 취로사업으로 이어가 마침내 1966년 1월 27일 점촌~예천 구간이, 그해 11월 9일 예천~영주 구간이 각각 개통됐습니다. 남강댐·섬진강댐 진입로, 양구~화천 간선도로, 정선선 철도, 울산공단 간선도로. 이 모두 국토건설단이 피땀으로 일군 작품들입니다. 의도와 달리 군 미필자와 불량배 등을 강제 징집하듯 끌고가 말도 많았지만 국토건설단은 그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피땀으로 뒷받침한 훌륭한 일꾼이었습니다.

    2023-12-19 06:30:00

  •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본부, 김동수 박사 초청  통일공감 토론회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본부, 김동수 박사 초청 통일공감 토론회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본부(대표 오장홍)는 6일 오후 대구 중구 매일빌딩에서 신경호 상임고문, 이수만 대경언론인회 사무총장, 김상하 전 현풍향교 전교, 통일지도 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탈북 외교관 출신 김동수 박사를 초청해 시민참여 통일공감 토론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동수 박사는 '최근 북한 정세와 한미동맹 강화' 주제 발표를 통해 "지금 북한은 주민과 지도층까지 김정은 독재정권의 폭정에 불만이 고조돼 폭발 직전의 위험 상태"라며 "북한의 핵 위협에 대비해 남남 갈등을 해소하고 한미일 공조를 강화해 안보를 더욱 튼튼히 해야 할 때"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오장홍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한반도 통일과 북 정권의 핵 위협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외 시민운동을 활발히 전개해 국제적으로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내야 한다" 며 코리안 드림 실천에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협조를 호소했다.

    2023-12-08 14:39:43

  • 김정모 박사 인도 국립 네루대 특강

    김정모 박사 인도 국립 네루대 특강

    김정모 영남신문 발행인(법학 박사)은 한국·인도 수교 50주년을 맞아 인도 국립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초청으로 4일 출국, 네루대 한국학과 학생들에게 '한국을 말한다'는 주제로 특강을 하고 뉴델리 언론인들과 간담회를 가진 뒤 12일 귀국한다. 1995년 개설된 네루대 한국어학과 경쟁률은 지난해 기준 3,300대 1이다.

    2023-12-03 11:21:43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기록] <4> 1966년 대대구 건설 신호탄 강정상수도 건설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기록] <4> 1966년 대대구 건설 신호탄 강정상수도 건설

    1966년 5월 23일 대구 감삼정수장(옛 두류정수장) 부지에서 열린 강정상수도 건설 기공식. "하나 둘 셋 발파~~" 내빈들의 발파 버튼에 1만 여 시민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두류산을 뒤흔들었습니다. 낙동강과 금호강 합수부에서 취수한 강물을 이곳까지 끌어와 수돗물로 정수하는 강정상수도 건설. 자유당 정권 시절인 1959년부터 계획됐지만 4·19혁명으로 연기, 5·16군사 쿠데타로 또 지연…. 이날 발파는 3정권 8대 시장이 씨름한 8년만의 대 역사로 '대(大)대구 건설'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1964년 가을부터 하늘이 마르더니 겨울이 가고 봄이 다 지나도록 비 구경을 못했습니다. 당시 수원지는 가창(가창댐)·산격(금호강 표면수)정수장, 동촌 보조수원지 등 3곳. 금호강은 매말라 백사장으로, 1959년 막은 가창댐 수위도 바닥으로 치달았습니다. 식수가 고갈되자 81만 대구 시민들은 '극악상태'에 빠졌습니다. 수압이 약한 산동네 수도꼭지는 마른지 오래. 3월 15일 현재 상수도에 의지하는 시민은 전체의 3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산 아래까지 10리 길에 물지게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물 한 지게에 15원이나 받아먹는 악덕 우물 주인도 생겨났습니다. 밥 지을 물이 없어 빵을 먹고 등교하는 아이도 늘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샘 판다고, 푸른다리(경부선 철교) 너머 산간 동네에선 공동 우물을 60m까지 파 내려갔습니다. 우물을 파던 인부가 흙더미에 묻히는 사고도 잇따랐습니다. "물을 주든지 공장 안 우물을 메우든지 하라!" 참다 못한 신천 4구 4백 여 동민들은 한국나일론 공장(현 수성4가)에 몰려가 공장이 동네 우물을 다 말렸다며 데모까지 벌였습니다.(1965년 3월 16일자 매일신문) 그해 4월 중순, 가창댐도 믿을 수 없게 되자 하루 5시간이던 제한급수가 3시간으로, 급기야 수성못 물을 빼내 식수로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가뭄은 1907년 서울에 통감부 기상대가 생긴 이래 가장 심한 가뭄…." 1965년 6월 13일자 매일신문은 이렇게 전했습니다. 목마른 세월이 흘러 1969년 1월 22일, 마침내 강정상수도가 준공돼 첫 통수를 봤습니다. 착공 2년 8개월 만입니다. 강정취수장-감삼(두류)정수장-대봉배수지까지 장장 16km. 1일 최고 생산 능력 13만 5천톤, 국내 최신식 시설로 고지대까지도 24시간 무제한 송수…. 수돗물이 남아 최소 5년간 식수 걱정은 덜게 됐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물을 긷는 시민도 많았습니다. 수도관이 코앞으로 지나가는데도 시설자금(약 3만원)이 무서운 영세민들에 상수도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상수도를 통수하던 날, 하늘에서 본 두류정수장 주변은 온통 논밭으로 아득합니다. 성서로 가는 외길(현 달구벌대로)에 자동차는 숨은 그림 찾기. 바늘 같은 전봇대만 하얗게 섰습니다. 50여 년 전 대구는 이랬습니다. 그때 기공식에 참석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대구가 너무 낙후됐다며 구원투수를 내려 보냈습니다. '대대구 건설' 특명을 받고 부임한 태종학 시장(재임 1966.5~1969.10)은 이튿날 새벽부터 현장을 찾았습니다. 강정상수도 건설, 3공단 조성, 동대구역 신설, 동대구로·달구벌대로 구상…. '불도저 시장'으로 통했던 그는 대구 지도를 새로 그렸습니다. 2023년 오늘, 드넓던 논밭은 빌딩 숲으로 논두렁 밭두렁 길은 '거미줄 도로'가 됐습니다. 대구 식수를 책임졌던 이곳 정수장 부지는 2008년을 끝으로 그 명을 다했나 싶더니 더 큰 숙제를 떠안았습니다. "2025년 5월 착공, 2030년 상반기 완공". 이곳에 둥지 틀 대구시 신청사는 대한민국 3대 도시 위상을 되찾을 심장부로, 대구의 랜드마크를 꿈꾸고 있습니다. 신청사 건립이 제2의 대대구를 건설하는 신호탄이 되길 소망합니다.

    2023-11-21 06:05:00

  •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2023 코리안 드림 대구경북 통일 실천 페스타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2023 코리안 드림 대구경북 통일 실천 페스타

    통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대구경북 본부(상임대표 오장홍)는 28일 오후 5시 두류공원 야외 음악당에서 2023 코리안 드림 대구경북 통일 실천 페스타를 가졌다. 신경호 상임고문의 개회 선언으로 시작된 이날 대회에는 권영진 전 대구시장,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 회장, 김용인 경우회 회장, 서인택 통일천사중앙회 상임의장 등 통일지도 자와 시민단체 대표, 시·도민 등 5천여 명이 참석했다. 권영진 전 대구시장은 축사에서 "통일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우리들이 꼭 해내야 할 시대적 사명이며 필수"라고 말하고 "국난 극복의 보루인 대구경북에서 코리안 드림 통일실천 천만인 캠페인에 앞장 서자"고 강조했다. 문현진 글로벌 피스재단 세계의장은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통일은 세계가 함께 해야 가능하며, 혼자꾸는 꿈은 꿈에 불과 하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실현 된다" 고 말하고 " 통일의 꿈을 함께 꿔 소원을 이루자" 며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했다. 이어 진행된 2부에서는 태권도 가수 나태주와 은가은 등 트롯 가수들의 축하공연이 열려 5천여 시민들이 깊어가는 가을밤의 정취를 즐겼다.

    2023-10-29 13:52:44

  •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30년 만에1983년 정부 차원 첫 기념식 산 증인 홍순벽 씨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30년 만에1983년 정부 차원 첫 기념식 산 증인 홍순벽 씨

    독도의용수비대(이하 수비대) 창설 30년 만인 1983년 7월 25일 울릉도에서 처음으로 정부 차원에서 기념식이 열린 사실이 확인됐다. 경북 봉화에 거주하는 홍순벽(87·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부회장) 씨는 수비대 창설 30주년 기념식에 정부를 대표해 참석한 대통령 국정자문위원 일행을 기록한 사진을 최근 공개했다. 수비대는 일본의 독도 불법 침범에 맞서 1953년 4월 30일 창설해 1956년 12월까지 독도를 지킨 순수 민간 조직이다. 홍 씨는 "당초 기념식은 광복절을 기해 1981년 8월 13일 예정됐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측의 압력에 2년 가까이 지나 국정자문위원 추최로 이날 열리게 된 것"이라며 "전두환 대통령도 참석해 대대적으로 열 계획이었지만 할 수 없이 문인 행사로 위장해 열었다" 고 했다. 기념식엔 청와대 비서실 지원 아래 정부를 대표해 국정자문위원들이 대신 참석했다. 참석한 국정자문위원은 홍종인, 홍승만, 신학진, 윤치영, 유달영, 정비석, 홍순벽 등 모두 9명. 홍 씨는 당시 46세 젊은 나이로 옵저버 자격으로 동행했다. 이들은 강원도 동해에서 1박 후 7월 25일 묵호항을 출발해 울릉도에 도착했다. 기념식은 독도에서 열 예정이었으나 기상 악화로 이날 오후 3시 울릉읍 도동 울릉공회당에서 열렸다. 기념식에는 독도의용수비대원, 울릉군민과 함께 청와대 비서실 관계자도 참석했으며 홍종인 국정자문위원이 축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순칠 수비대장 미망인 박영희(92) 여사는 "기념식에 나도 홍 대장과 함께 참석했다"며 "홍 대장은 육필로 기념사를 써서 30년 전 맨몸으로 독도를 지킨 그날을 회고했다"고 말했다. 기념식 후 국정자문위원들이 육지로 나갈 때 기상 악화로 배가 뜰 수 없게 되자 청와대에서 급히 주선한 제1함대 군함을 타고 돌아갔다. 홍 씨가 공개한 사진은 모두 9장. 동해 묵호항, 울릉도, 군함 등지에서 국정자문위원 일행을 기록한 것으로 지인이 갖고 있던 것을 몇 년 전 입수해 자택에 보관 중이다. 사진 속 위원들은 모두 작고해 홍순백 씨만 유일한 하게 생존해 있다. 홍 씨는 "당시 민감한 한일 관계로 수비대 얘기는 입 밖에도 못 꺼낸 시절"이라며 "이 사진들은 정부 차원에서 첫 기념식을 열고 그 존재를 인정한 증거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2023-10-24 06:05:00

  •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3> 1954년 독도대첩

    [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3> 1954년 독도대첩

    1953년 6월 27일 아침, 또 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2척의 일본 해상 순라선이 독도에 상륙, 한국 어부 6명을 체포해 퇴거를 명하고 전마선(배와 배, 육지 등을 오가는 작은 배) 1척을 나포했습니다. 이들은 "한국이 일본 영토를 침범했다"며 '일본령 죽도(日本領 竹島)' 말뚝까지 박았습니다.(동년 6월 29일 자 매일신문). 황당한 소식에 울릉경찰과 군 직원들은 즉시 독도로 달려가 말뚝을 뽑고 그 자리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독도' 표식을 세웠습니다. 뭍에선 6·25 전쟁통에 정신없는데 독도에선 일본이 정색하고 전쟁을 걸어왔습니다. 1952년 6월 25일 일본 수산시험선이 독도에 첫 상륙하면서 시작된 독도 영유권 말뚝 박기 전쟁. '일본 땅' 말뚝을 뽑고 '우리땅 독도'를 박으면 시멘트가 채 굳기 전 또 뽑히고…. "이러다간 울릉도마저 빼앗기겠다." 울릉 군민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6·25 참전 제대 군인 청년들이 홍순칠 대장을 중심으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 독도에서 고독한 사투가 시작됐습니다. 말뚝 대신 동도 바위에 '한국령(韓國領)'을 단단히 새기고 전마선 한 척으로 독도를 휘돌았습니다. 전마선은 곧 생명선. 순찰도, 전투도, 식수도, 양식을 구하는 일도 모두 이 작은 목선에 의지했습니다. 풍랑에, 태풍에 부서지고 침몰되길 무려 13차례. 전마선을 잃은 날엔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1953년 여름, 식량이 바닥나자 태풍에 독도로 피항 온 일본 어선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서도 앞 저 전마선은 그 무렵 촬영됐습니다.(2023년 10월 20일 홍순칠 대장 미망인 박영희 여사 증언). "독도 생활은 빤쯔(팬티)만 입고 수영을 일삼아 마치 20세기 무인도 타잔을 연상케 한다. 식수를 구하려 동도에서 물이 나는 서도까지 수영 끝에 1인 당 3홉(약 540㎖)씩. '깔다귀'라는 인육을 침식하는 벌레에 온몸은 험 투성이며, 된장국과 어류 음식만으로 변비증에 걸려 대원들의 항문이 헐어빠지는…."(1954년 9월 25일 자 매일신문) 홍순칠 대장의 기자회견은 처절했습니다. 도 경찰국과 수비대 월동대책 협의 차 짬을 내 대구에 온 그는 "일본 무장 경비정이 매월 정기적으로 독도를 침범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954년 11월 21일, 마침내 큰 일이 터졌습니다. 일본 무장 경비정 세 척이 초소 3백m까지 기어 들어왔습니다. 펄럭이는 일장기에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박격포, 중기관총, 소총 등 화력을 있는 대로 퍼부었습니다. 사즉생의 순간, 경비정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도망쳤습니다. 채 20분도 안돼 이번엔 비행기가 날아와 5, 6회 선회하더니 기관총에 놀라 하늘 멀리 꽁무니 뺐습니다. "사상자 16명에 선체 대파…." 이날 저녁 NHK 방송에선 이런 보도가 흘러나왔습니다.(1965년 6월 23일 자 매일신문 - 홍순칠 대장 인터뷰) 일본은 즉각 엄중 항의했습니다. 앞서 9월 22일, '독도는 분쟁 지역'이라며 국제사법제판소 제소 결정에 이어 이번엔 독도우표가 붙은 우편물이 불법이라며 한국으로 반송하는 보복을 가해 왔습니다. 우리 정부는 알은 채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체신부는 그해 9월 15일 서둘러 3종의 독도우표 3천만 장을 찍었습니다. 일본으로 가는 우편물은 월 평균 3만 통. 국민들은 보란듯이 '대한민국 독도' 우표를 붙여 일본 열도 구석구석까지 보냈습니다. 일본의 우편물 반송 보복은 국제사회와 자국 내 반대 여론에 결국 중단됐고,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역시 우리 정부의 불응으로 그해 12월 6일 마침내 없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치열했던 1954년 독도대첩. 독도우표 세례로 열도를 뒤흔든 열혈 국민, 약소국이었지만 지혜를 발휘한 대한민국 정부, 무엇보다 맨몸으로 기꺼이 독도로 달려간 의용수비대의 승리였습니다. "날이 새면 보이는 건 푸른바다 푸른하늘뿐, 대원들 입에선 향수의 노래가 자주 흘러나왔다. 곰곰히 생각하니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 땅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1965년 6월 22일 자 매일신문). 울릉도로 돌아온 홍순칠 대장은 그날을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내일(25일)은 독도의 날. 6·25 전쟁은 휴전 됐지만 일본이 걸어온 독도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2023-10-24 0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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