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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나눔, 기적 같은 선물] 연재 순서
〈1편〉 실낱같은 희망, 기약 없는 기다림
〈2편〉 생의 끝에서 삶의 시작으로
〈3편〉 다시 눈을 뜨고, 다시 숨을 쉽니다
〈4편〉 생명 잇기의 숨은 조력자들
〈5편〉 '장기기증 후진국' 벗어나려면
지난 3월 27일 부산 장애인종합회관에서 만난 오성옥(58) 씨의 왼팔엔 막 지혈을 마친 듯한 자국이 곳곳에 보였다. 30년간 신장 투석을 받으며 이틀에 한 번꼴로 굵은 주삿바늘을 꽂은 흔적이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살을 파고드는 주사로 성옥 씨의 팔은 제 모습을 잃은 지 오래다.
"일반 주사보다 세 배는 더 굵은 투석 바늘이 4시간 동안 꽂혀 있어요. 팔이 남아날 리가 없죠. 처음에는 오른팔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안 돼서 왼팔로 투석하고 있어요"
◆ 20대 젊은 나이에 찾아온 말기 신부전
성옥 씨의 신장에 문제가 생겼던 건 1995년 3월. 처음엔 발목에 찾아온 통증과 부기를 단순히 통풍으로 생각했다. 서울 구로구의 한 봉제공장에서 근무하던 하루는 소변을 본 뒤 눈을 의심했다. 소변 위로 거품이 빽빽하게 떠 있었던 것.
"몸에 힘도 없고 평소보다 음식을 많이 먹어도 살이 안 쪘어요.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고 느꼈지만 심각성을 몰랐었죠. 그때까지는요"
그 주말 오후 2~3시쯤이었다. 방 안 침대에 몸을 눕히자 숨이 콱 막혔다. 생전 겪어보지 못한 호흡곤란이었다. 119를 불러 서울 동부시립병원을 찾았더니 의료진은 "왜 이런 상태까지가 되어서야 병원에 왔냐"며 성옥 씨를 호통쳤다.
"지금 폐에 물이 가득 차 있어요. 당장 신장 투석을 받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성옥 씨의 병명은 '말기 신부전'. 노폐물을 걸러내는 신장의 기능이 10%도 남지 않아 몸에 독소가 가득 쌓인 것이었다. 엑스레이(X-ray) 검사 결과 신장은 말라붙은 건자두처럼 쪼그라든 모습이었다.

혈액 속 노폐물과 수분을 제거하고 정화된 혈액을 다시 몸속으로 넣어야 했다. 이를 위해선 팔의 혈관을 미리 확장해두는 시술이 필요했다. 급하게 응급실로 왔기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급한 대로 목 부위 정맥에 카테터(의료용 관)를 삽입하고 긴급 투석이 진행됐다.
그제야 과거에 어머니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5살이었던 성옥 씨는 어머니가 일하는 미군 부대 축제에서 덜 익은 치킨을 먹고 신부전을 앓은 적이 있다. 소변은 나오다 말기를 반복했다. 얼굴과 몸은 퉁퉁 부어올라 도저히 또래 아이의 모습이라 보기 어려웠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병은 기적처럼 호전됐다. 그 무렵,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아들에게 "술과 담배는 절대 해서는 안 되고, 짠 음식도 멀리해야 한다"고 누차 주의를 줬다.
건강을 소홀히 한 대가였을까. 그렇게 성옥 씨는 1995년 3월 15일, 29살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평생 신장 투석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됐다.
"어릴 때 앓았던 신부전이 20년이 지나 말기 질환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어요. 죽을 때까지 병원을 오가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죠"
◆ 이틀에 한 번 투석으로 망가진 일상

투석 생활이 시작되면서 삶의 질은 곤두박질쳤다. 혈액 속 노폐물을 걸러내기 위해 이틀에 한 번 병원을 찾는다. 투석 받는 시간만 기본 4시간. 왕복 시간까지 더하면 하루에 5~6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간 몸을 담았던 공장은 성옥 씨의 사정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하는 평범한 일상은 멀어졌다. 대리기사부터 각종 아르바이트까지 시간제 일자리를 전전했다.
어릴 때 지냈던 부산으로 내려온 뒤에는 서면 길가에 노점을 차리고 향수 미니어처와 도금 목걸이를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불법 영업이라며 주변 상인들의 눈총과 욕설도 이어졌다. 마지못해 '신장 투석 환자'라는 문구를 내걸고서 장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먹고 싶은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없었다. 소변으로 노폐물이 배출되지 않기 때문에 먹는 족족 독소가 쌓이는 '요독'이 생겨서다. 자칫 과식하면 얼굴과 손, 발이 붓는 것은 기본이었다.

투석 초기 앉은 자리에서 딸기 1㎏를 먹은 날이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고 몸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마비 증세가 찾아왔다. 과일 속 칼륨을 배출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증상이었다. 병원으로 실려 간 뒤 응급 투석을 받고 나서야 겨우 몸을 가눌 수 있게 됐다.
"신부전 환자가 꼼짝도 못 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같은 이유로 부산 사람이지만 저는 회 한 젓가락도 뜰 수가 없어요"
성옥 씨는 500㎖ 생수 한 병을 콸콸 마셔보는 게 소원이다. 수분도 체내에 축적되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 갈증이 나도 정해진 양만 들이켜야 했다. 너무 목이 마를 때는 혀에 물을 적시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그의 입술과 입안은 365일 내내 마르고 갈라져 있다.
건강이 망가진 데다 경제력까지 잃으면서 결혼에 대한 로망도 산산조각이 났다.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이 경제력을 갖추고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괴감이 너무 들었어요. 열심히 살아야 할 한창의 나이지만, 저는 병원에 발이 묶인 채로 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 이식 대기만 20년…기증자 연락 한번 없었다

"이제는 신장 이식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투석 10년 차였던 2005년. 병원 의사는 성옥 씨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전했다. 한두 방울이라도 나오던 소변이 끊기면서, 이제는 타인의 장기를 이식받지 않고는 삶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마다 피검사를 반복하며 기증자를 기다렸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병원으로부터 '신장 기증자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사이 감당해야 할 합병증은 점점 늘어만 갔다. 수십 년간 반복된 투석 바늘로 혈관통이 생겼다. 어깨부터 팔까지 뻐근함을 달고 사는 탓에 무거운 물건을 들 수도 없다. 부갑상선 호르몬 조절 이상에 소화 장애, 치질도 있다.
주삿바늘을 자주 꽂으면서 항응고제를 장기간 복용하다 보니 조금만 부딪혀도 멍이 든다. 하루에 먹는 약만 심장약과 위장약, 인약, 칼슘보충제 등 20알에 달한다.
투석으로 몸에 영양분도 흡수되지 않는다. 운동을 꾸준히 해도 몸에 근육이 붙기는커녕 살은 계속 빠져가고 있다. 병원과 집을 오가는 실내 생활이 대부분이지만 성옥 씨의 얼굴은 수척했고 피부는 혈기가 돌지 않아 어둡게 그을려 있었다.
투병 생활 동안 죽음의 문턱 코앞에도 다녀왔다. 투석 3년 차 즈음해 민간요법에 의지하면서 약 복용을 소홀히 했다. 그 결과 몸에 쌓인 칼륨으로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갔다. 심정지였던 것. 심장충격기 처치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투석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지인 5명이 사망했는데 저도 똑같이 될 뻔했어요. 죽음까지 생각하게 되면서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매일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삶은 정신적으로도 버티기 어렵다. 투병 중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마저 20년 전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 성옥 씨를 돌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이번 생에 타인의 신장을 이식받아 늦게나마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오기를 바라는 고귀한 선물을 기다리며 오늘도 투석을 위한 채비를 한다. 성옥 씨는 전날 주삿바늘 자국에 붙여둔 밴드를, 또 한 번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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