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은 '근로자의날'이었다. 이즈음 많은 이들은 전태일(1948~70) 열사를 떠올린다. 서울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그는 22세이던 1970년 11월 13일 자기 몸에 불을 붙인 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고 숨졌다. 이후 전태일이란 이름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대구 중구 남산동 7178-1번지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옛집이 있다. 2019년 꾸려진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이 시민 모금을 통해 부지를 매입하고 기념관으로 꾸며 지난해 11월 개관했다.
전태일의친구들 제2대 이사장으로 '전태일 옛집' 복원을 주도했던 송필경 전태일의친구들 고문을 지난달 28일 대구 범어송치과에서 만났다. 그는 치과의사로 30여 년 동안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이어왔다.
-대구 남산동 전태일 옛집은 어떤 곳인가.
▶전태일 열사가 1962년 8월부터 1964년 2월까지 살았던 장소다. 대구에서 난 전태일은 두 살 때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가 12년 뒤 대구로 되돌아왔다. 그 시절 1년 6개월여 동안 세 들어 산 곳이 남산동 집이다.
현재 의자 형태의 조형물이 놓인 자리 주변 4평 조금 안 되는 공간에서 전 열사를 포함해 6명이 함께 살았다. 당시 그는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등학교 내에 있었던 중등 과정 야간학교)를 다녔다. 그는 학교생활과 배움의 즐거움에 빠졌던 이 시절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일기에 언급했다. 하지만 1963년 11월 학업을 중단하게 됐고, 1964년 2월 가족들은 생계를 위해 또다시 대구를 떠나게 된다. 이곳은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을 제외하고, 전태일 열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옛집 복원의 시작이 궁금하다.
▶2015년 무렵 유족과 지인들의 증언으로 대구 옛집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게 됐다. 이후 열사의 삶의 흔적이 유일하게 남은 곳이기에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 같은 대구 시민의 뜻이 모여 2019년 3월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이 조직됐고 시민 모금 운동이 시작됐다. 1년여 동안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5억5천여만원 정도가 모였다. 그 돈으로 옛집을 사들였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은 2020년 11월의 일이다. 50주기 전날인 11월 12일엔 그의 이름을 새긴 문패를 옛집에 달았다.

-2020년 '사람 전태일, 왜 전태일인가'라는 책을 내고 책 판매 수익금 전액을 옛집 복원을 위해 썼다고 들었다.
▶전태일 옛집 복원은 지자체나 정부의 지원 없이 100% 시민 후원으로만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옛집 매입을 위한 1차 모금과 복원을 위한 2차 모금 등 2차례 모금을 통해 9억원 정도가 모였다. 4천명이 넘는 시민이 동참했다.
한 대기업 노동조합에서 수천만원 기부하고 학교 동문회 차원에서 목돈을 기부하는 등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 개인 기부로 이뤄졌다. 특히, 한 변호사는 승소 성공보수 4천만원 전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금액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목돈을 낸 기부자도 수십 명에 이른다.
-전태일 열사 가족이 살았던 셋방 건물을 새로 짓지 않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남겨둔 점이 인상적이다.
▶매입 직후 집을 살펴보니, 주인집 건물(현 전시관)은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전 열사 가족이 세 들어 살던 건물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후 발굴 작업을 통해 셋방 터 주춧돌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21년부터 어떻게 고치느냐하는 복원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철거하고 새로 짓자는 의견과 그대로 보전하자 등 다양한 의견과 주장이 나왔고, 수차례 조율을 거쳐 전체적인 방향을 결정했다. 주인집은 최대한 원형을 보존하고, 셋방 터는 건축물을 설치하지 않고 최소한으로 손을 대자는 대원칙을 세웠다. 고증도 되지 않은 건물을 세우기보다는, 집터라는 것만을 알 수 있는 빈 공간으로 만들어, 전태일의 정신을 방문객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셋방 터엔 그 시절 학교 교실에 있던 나무의자 형상을 한 '열여섯 태일의 꿈'이라는 형물 하나만을 놓아, 그 시절 공부를 간절히 원했던 전 열사와 그의 정신을 떠올릴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11월 13일 54주기 날에 맞춰 옛집을 개관했다. 운영은 어떻게 하고 있나.
▶아직까지 상근 직원 등 관리 방안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상근 직원을 두고 제대로 운영하려면 매월 최소 400만원 정도의 운영비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상근 직원이 없는 탓에 현재 전시관은 비정기적으로 개방하고 있다. 다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생각에서, 강연이나 소모임을 할 수 있도록 대관 신청을 받고 있다.
전태일의친구들 초대 이사장은 모금을 통해 옛집 매입을, 저는 복원 사업을 주도했다. 지난 2월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기에 후임인 제3대 이사장이 이 문제를 지혜롭게 잘 해결하리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매월 운영비 정도의 후원금이 고정적으로 들어올 수만 있다면 해결되지 않을까 한다. 언론이나 시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한다.

-전태일 정신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
▶'인간존엄'이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발현됐는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은 정치적 요구였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외침은 윤리적 요구였다. 20세기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외침이 아닐까 한다.
그의 이런 정신은 '연민'에서 비롯됐다. 전태일은 자기 버스 요금으로 쓰려던 30원(당시 편도 10원)을 몽땅 털어 배고픈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서 나눠줬다. 그리고 평화시장에서 쌍문동 판잣집까지 걸어서 퇴근하다 야간 통행금지에 걸려 파출소에 쪼그려 앉아 잠을 청했다. 본인도 엄청나게 고통스럽게 살았는데 자기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자기 가게를 꾸릴 수 있는 재단사였음에도 전태일은 '위'가 아닌 '아래'를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태일 열사 옛집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노동운동 정신이 깃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들에게 가졌던 연민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슴 속에 깊이 새길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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