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족상잔의 크나큰 비극, 6·25전쟁
1950년 6월 25일, 우리 민족 역사상 최대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停戰)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된 역사적 사건이다. 전쟁 발발로 우리나라는 미증유의 격동기이자 대혼돈의 상태에 빠졌다. 파죽지세로 몰아치는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해 국군은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잃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 정도 된 1950년 7월 말 기준으로 대구지역에는 20~40만 명의 피난민이 몰려들었다(군사편찬연구소, 2003). 대구는 70만 명이 넘는 인구가 밀집된 피난도시가 된 것이다. 중국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더 많은 피난민이 내려왔다. 1950년 12월, 한겨울 상황 속에 많은 피난민이 화물열차 위에 빽빽하게 자리 잡아 피난길에 나섰다. 대구역 광장은 각 지역에서 온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50년 7월 5일, 미군의 참전을 시작으로 6·25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7월 9일에는 대구에 미8군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8월 1일, 미 8군 사령관으로 한미연합군을 지휘하던 워커 사령관이 낙동강과 그 일대의 산악 지대를 연결하는 최후의 보루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8월 15일 왜관이 점령되면서 북한군은 대구에서 가까운 왜관 지역까지 밀려왔다. 8월 16일에는 왜관철교 근처에 융단폭격이 가해졌고, 8월 18일 금호강까지 침투한 북한군은 대구를 향해 120㎜ 중박격포를 날렸다. 그 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대구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이때까지 밀리기만 하던 한국군과 UN군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다행히 전세를 역전시켰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의 하나가 무려 55일간 처절한 공방 전이 펼쳐졌던 '다부동전투'이다. 다부동은 대구로 들어오는 길목이었고, 대구를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난의 삶을 품어준 임시수도 대구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7월 16일 대구에 임시수도를 설치한다. 그해 8월 17일까지 한 달여 정도 대구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다. 지금의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인근에 있던 경북도지사 관사를 정부의 임시 관저 겸 집무실로 사용했다. 대구가 임시수도로 지정되면서 지역의 각급 학교는 일제히 휴교에 들어갔다.
대구 시내 각급 학교를 비롯한 주요 시설물들은 정부 기관이나 군 기관에 접수되어 작전 수행을 위한 거점이 되었다. 한국은행 대구지점은 국방부 임시 청사로 사용되고,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은 육군병원 기능을 했다. 구 능인중고등학교와 남산초등학교 자리는 신병교육대로, 구 대구상고 자리는 미공군사령부로, 서부초등학교는 공군본부 등으로 사용되었다.

대구 문화극장(현 CGV한일)은 국회의사당 역할을 담당했는데 유엔한국위원단 공개회의와 애국 포로 석방 환영 시민대회 등이 열리기도 했다. 7월 19일에는 대구에서 '대한학도의용대'가 결성되었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켜 내기 위하여 학생들이 '책 대신 수류탄과 총을 달라'면서 결성한 학도의용군이다.
정부가 대구로 수도를 옮기면서 대구 지역으로 피난민이 더욱 집중되었다. 각지에서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대구 시내 거리와 골목에는 인파로 홍수를 이루었다. 대구 지역 내 피난민 임시수용소는 신천변, 대구역 주변, 금호강 동촌유원지 부근, 비산동 동·서부 외곽지대, 동부와 북부 지대 등에 마련되었다.
특히 1·4 후퇴 이후 북한 지역의 피난민이 추가되어 변두리 지역과 도심 내 도로변까지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가족과 생이별하고 거처할 곳도 여의치 않았던 피난민들은 나무판자로 만든 집에서 힘겹고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전쟁 중 배움의 터, 서울피난대구연합중학교
피난민 중에는 학생들도 많았다. 대구는 전쟁 상황에 대부분의 학교 시설을 군대에 넘겨주어 교육시설이 크게 부족했고, 피난 학생들은 교육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1951년 9월 20일에 서울에서 피난 온 학생들을 위한 '서울피난대구연합중학교'가 개교했다. 대구 중구 남산동 옛 일본 육군관사 자리에 공식 인가된 학교로 지어진 서울피난대구연합중학교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교가를 작사했다.

물론 판자로 얼기설기 짓고 맨바닥인 교실에 한 반 학생이 100명이 넘는 열악한 교육환경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간 피난학교 학생들은 대구에서의 학교 수업 덕분에 차질 없이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서울피난대구연합중학교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배움의 길을 이어갈 수 있게 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산실
6·25전쟁기 대구 지역은 수많은 문화예술인의 피난처이자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산실 역할을 담당했다. 지역 고유의 예술이 진흥되고 중앙예술의 도입이 이루어지면서 한국예술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대구 문화극장(현 CGV한일)은 국립극장의 역할을 하였다. 이곳은 광복 후 최초로 연극 공연이 이루어진 서구식 극장이다.
1952년 국립극장으로 지정되면서 대구를 비롯한 한국 공연예술 발전의 좋은 배양토가 되었다. 지역의 우수한 공연 예술가들이 대구 문화극장에서 탄생했고, 그들이 대구와 한국 문화계를 이끌어 가는 유능한 예술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대구는 한국 음반산업의 중심지였다. 전국 유일의 '오리엔트 레코드사'를 중심으로 전쟁과 분단으로 헤어진 사람들의 정서가 담긴 앨범을 많이 발매하였다.

대중가요 '굳세어라 금순아'도 대구에서 제작되었다. 당시 대구에는 육군본부와 공군본부가 주둔해 있었다. 이로 인해 전시 상황에 필요한 군 관련 출판물 생산·보급 활동의 거점이 바로 대구였다. 대구의 예술인들은 종군 예술인으로 활동하며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54년 2월 16일, 일본에서 신혼여행 중이던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가 군용기를 이용하여 한국으로 왔다.
전쟁에 참전한 UN군 장병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맨 처음 방문한 곳은 서울이 아닌 바로 대구, 대구의 동촌 공군비행장이었다. 이는 한국전쟁기 낙동강 방어선에서 대구 공군기지의 공헌도와 중요성이 그만큼 컸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6·25전쟁기의 대구 문화예술계는 암흑의 시대에도 살아있는 희망의 씨앗을 뿌렸던 요람이었다.

대구 지역에서 쌓아 올린 문화예술의 지층은 아직도 켜켜이 남아있다. 스포츠대회 역시 전쟁 중에도 활발하게 열렸다. 1951년 '전조선 씨름대회'가 개최되었고, '제15회 핀란드 헬싱키 올림픽(1952)' 마라톤 예선전도 진행되었다. 헬싱키 올림픽에 파견된 선수단의 훈련 장소도 대구였다.
6·25전쟁은 50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와 막대한 물적 피해를 낳은 전쟁으로 씻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크나큰 비극이었다. 대구 지역은 북한군이 들어오지 않는 비점령 지역으로 직접적인 전쟁 피해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물자와 인력의 공급기지이자 군사령부와 각종 군사기관이 집적된 군사 중심지였다.
또한 실향민의 피난처로서 중요한 치안과 보건 임무도 수행했다. 이 과정에는 국가적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기 위한 대구인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대구는 전란 속 피난민을 포용하는 터이자 우리나라 정치·경제·문화·군사 중심지로서 국난 극복의 교두보였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예성강 방사능, 후쿠시마 '핵폐수' 초과하는 수치 검출... 허용기준치 이내 "문제 없다"
국힘 "李정부, 전 국민 현금 살포 위해 국방예산 905억 삭감"
임은정, 첫 출근 "한때 존경했던 검찰 선배가 내란수괴…후배들 참담"
김민석 국무총리 첫 일정 농민단체 면담…오후엔 현충원 참배·국회의장 예방
영주역 광장, 납공장 용광로보다 더 뜨거웠다…3차 궐기대회 2천여명 모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