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경북 청송군 청송읍 한 과수농가.
비에 젖은 사과밭에는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흙탕물로 질퍽해진 밭고랑 사이로 장화를 신은 농민이 천천히 발을 옮겼다. 나뭇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는 아직 붉게 익지 못한 채 옅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수확을 코앞에 둔 부사품종은 지금 '색 내기'의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다.
"비가 이렇게 오래 올 줄은 몰랐어요. 반사필름을 깔려고 했는데 흙이 튀고 물이 고여서 아무 소용이 없어요."
농민 김모(62) 씨는 축축한 필름을 손끝으로 들어 보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필름 위엔 낙엽과 흙이 엉겨 붙어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맑은 날엔 필름이 햇살을 아래로 비춰 사과가 고르게 붉게 익지만, 비가 오면 '색 내기'는 멈춘다.
비는 추석 연휴부터 열흘 넘게 그칠 줄 몰랐다. 사과 표면에는 물방울이 맺히고, 가지 끝에서는 익지 못한 사과 몇 알이 땅으로 떨어져 있었다.
농가에서는 "비가 오면 사과를 만질 수조차 없다"고 입을 모은다.
농민들은 "비 맞은 사과를 따면 바로 멍이 들고 조금만 눌러도 상처가 나서 상품이 안 돼 그냥 보고만 있다"고 발을 구르고 있다.
청송 부사는 색과 당도가 생명이다. 그러나 흐린 하늘 아래에서는 두 조건 모두 위태롭다.
올여름 강한 햇볕 덕분에 당도는 예년보다 높게 형성됐지만, 수확 직전 올해처럼 흐리고 비가 잦으면 당도를 유지하기 어렵다. '빨갛게 익은 청송사과'의 명성도 빛이 바래기 십상이다.
이종서 청송군 유통정책과장은 "현재 당도는 충분하지만 색이 고르지 않아 농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앞으로 맑은 날이 이어져야 색 품질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송군은 최근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반사필름을 대체할 수 있는 투광성 부직포와 착색 보조 필름, 방수망 설치 등을 시범 도입하고 있다.
청송군 관계자는 "기후 대응형 재배기술 보급이 품질 유지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송사과협회 초대 회장을 지낸 현시학 전 청송군의원은 "흐린 날이 잦다 보니 초가을 수확이 12월까지 밀리는 경우도 많다"며 "특히 시나노골드 품종은 비가 많으면 수분이 과해 터지는 경우가 늘어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나라도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가을에 비가 잦은 아열대성 기후에 들어섰다"며 "기후에 맞는 품종 개발이 시급하지만, 당장 농민이 견뎌야 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다. 서리를 맞더라도 수확을 늦추는 농가가 늘어나는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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