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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환의 세계사] 성탄절…십자군 타협 정신이 갈등 사회에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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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설렘의 시간은 뒤로 밀린다. 지구촌이 갈등과 증오 속에 피로 얼룩진다. 지난 15일 호주 시드니 유대교 전통 축제 '하누카' 행사,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의 전장…. 국내도 다를 바 없다. 대화와 타협은 실종되고, 이성 잃은 갈등과 적개심만 갈수록 커진다. 중세 기독교와 이슬람교 십자군 전쟁의 타협과 배려 정신을 들춰본다.

◆몽골 초원의 8세기 돌궐(튀르크) 비석

콜테긴 비석 복제품. 돌궐(튀르크)족 왕족 콜테긴이 죽자 형 빌게 카간이 732년 몽골초원 오르혼 강 유역에 세운 비석이다. 진품은 현장에 남아 있다. 몽골 울란바토르 국립 박물관.
콜테긴 비석 복제품. 돌궐(튀르크)족 왕족 콜테긴이 죽자 형 빌게 카간이 732년 몽골초원 오르혼 강 유역에 세운 비석이다. 진품은 현장에 남아 있다. 몽골 울란바토르 국립 박물관.

겨울 몽골 초원은 낮에도 영하 20도를 오르내린다. 그 혹독한 조건에서 나름의 문화를 일궈온 기마민족의 흔적들이 울란바토르 국립박물관에서 기다린다. 고대 국가 전시실로 가면 2004년 튀르키예 국제협력재단이 마련한 튀르키예 문화 자산 전시홀이 맞아준다. 높이 3.25m 높은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콜테긴(고궐특근, 故闕特勤) 비석(732년 건립) 복제품. 진품은 징기스칸 대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 북쪽 오르혼 강변에 그대로 남아 있다. 콜테긴은 고구려의 경쟁국이자 동맹 상대 돌궐(突厥, 튀르크)족이다. 고대 튀르크 문자와 한자로 병기된 비문을 보면 오늘날 지중해에 터를 잡은 튀르키예의 조상은 몽골초원에 살았다.

◆사마르칸드 돌궐 바르후만 궁전의 고구려인

돌궐 왕 바르후만(佛呼縵) 궁전 벽화. 650년 경. 머리에 새깃털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차림의 고구려 사절 2명이 등장한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아프라시압 박물관.
돌궐 왕 바르후만(佛呼縵) 궁전 벽화. 650년 경. 머리에 새깃털을 꽂은 조우관(鳥羽冠)차림의 고구려 사절 2명이 등장한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 아프라시압 박물관.

몽골초원에서 서쪽 중앙아시아 문명의 교차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란 등 서아시아 전역을 유린하고 명나라로 침략하다 병사한 티무르 황제 무덤이 자리한다. 티무르의 황후 사라이 물크 하눔을 기리는 이슬람 건축예술의 절정, 비비하눔(황후) 모스크에서 북쪽으로 4km 지점 아프라시압 박물관은 한국인에게 각별하다. 돌궐 왕 바르후만(불호만, 佛呼縵) 궁전 벽화에 조우관(鳥羽冠, 새깃털관)을 쓴 고구려 사신 2명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650년경 고구려인을 만나고, 돌궐의 서쪽 진출 경로를 따라 서아시아로 가보자.

◆돌궐 11세기 아나톨리아(현대 튀르키예) 정착

오스만 튀르키예 제국(1299년~1922년) 창시자 오스만 가지 무덤. 셀주크 튀르크의 쇠위트 지역 영주 오스만 가지는 오스만 튀르키예 제국를 세워 현대 튀르키예의 초석을 놓았다.부르사.
오스만 튀르키예 제국(1299년~1922년) 창시자 오스만 가지 무덤. 셀주크 튀르크의 쇠위트 지역 영주 오스만 가지는 오스만 튀르키예 제국를 세워 현대 튀르키예의 초석을 놓았다.부르사.

서아시아의 맨 끝 튀르키예 부르사에 가면 오스만 튀르크 제국(1299~1922)의 창시자 오스만 가지의 무덤이 자리한다. 돌궐족이 1037년 이란을 정복해 셀주크 튀르크 제국을 수립한 데 이어 바그다드의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동로마 제국 아나톨리아(튀르키예 아시아 땅)에 나타난 것은 11세기 후반. 1071년 튀르키예 동부 만지케르트에서 동로마 황제 로마노스 4세를 포로로 잡으며 대승을 거둔다. 이어 룸 술탄국(이슬람 로마 제국)을 세운다. 룸 술탄국의 서쪽 동로마 제국 국경 쇠위트 지역 영주가 오스만 가지였다. 오스만이 1299년 나라를 만들고, 아들 2대 술탄 오르한이 1326년 부르사를 정복해 아버지 묘소를 마련한 거다.

◆십자군, 예루살렘 저복 뒤 4개 나라 세워

셀주크 튀르크는 1067년 동로마의 기독교 도시 안티옥과 니케아를 차지한 데 이어 1073년 이슬람 파티마 왕조로부터 예루살렘까지 빼앗는다. 예루살렘을 지배한 셀주크 튀르크의 영주 아르투크 장군 가문은 기존 이슬람 왕조와 달리 기독교도 세금 인상 등을 통해 성지순례를 까다롭게 만든다. 이에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1095년 도움을 요청하고, 교황 우르바노스 2세가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1096년 공의회를 열어 십자군을 제창한다. 참석자들과 군중은 "데우스 불트(DEUS VULT, 신이 원한다)"를 외치며 1차 십자군(1096년~1099년)의 닻을 올린 다. 십자군은 1098년 안티옥,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4개의 십자군 국가를 세운다. 1098년 에데사 백작국, 안티옥 공작국, 1099년 예루살렘 왕국, 1109년 트리폴리 백작국이다.

◆튀르크 장기, 십자군 국가 에데사 백작국 정복

튀르키예 남부 시리아 국경지대에 자리한 유서 깊은 역사 도시 산르우르파로 가보자. 『구약』 창세기에 아담의 9대손 노아, 노아의 10대손 아브라함이 님롯 왕에게 불태워질 무렵 야훼 하느님의 구원으로 살아난 현장이 산르우르파 발르클르괼(물고기 연못)이다. 산르우르파가 십자군 첫 번째 나라 에데사 백작국 수도다. 셀주크 튀르크의 알레포 아타벡(영주) 장기는 1144년 에데사 백작국을 멸망시킨다. 이에 맞서 2차 십자군(1147년~1149년)이 성지로 오지만, 빈손으로 돌아간다. 사기가 오른 이슬람의 차기 주역이 바로 살라딘이다.

◆쿠르드족 아유브 왕조 살라딘 예루살렘 회복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로 가보자. 2011년 '아랍의 봄' 때 시작된 내전이 2019년 8년 만에 잦아들었다지만, 아직도 정쟁이 불안한 상태다. 필자는 2000년 평온하던 시기 다마스커스를 찾아 살라딘의 동상을 만났다. 현재 시리아 북동부의 자치 세력 쿠르드족 출신인 살라딘은 1171년 아유브 왕조를 세운 뒤,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에 승리하며 예루살렘을 이슬람 수중으로 되돌린다. 예루살렘을 잃은 서유럽 기독교 사회는 3차 십자군(1189년~1192년)을 조직했고, 이때 인류 역사에 귀감이 될 모범적인 협상의 장이 열린다.

◆3차 십자군 리차드 1세와 살라딘의 현실적 협정

3차 십자군의 주역 영국의 사자심왕 리차드 1세와 살라딘은 승패를 주고받는 전투를 치른 뒤, 1192년 9월 2일 야파 휴전(라믈라 협정)에 합의한다. 1. 예루살렘 살라딘 통치, 2. 기독교도 순례 허용, 3. 아코~야파 지중해 항구 십자군 보유.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가 아니다. 서유럽 사회의 해상 보급이 가능한 해안 항구는 십자군이 지배하고, 내륙이어서 보급로 유지가 어려운 예루살렘은 이슬람 측이 차지하는 현실적 타협안이다. 대신 기독교도의 예루살렘 순례를 보장해 평화를 지킨다. 1096년 1차 십자군이 결성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가 셀주크 튀르크의 예루살렘 순례 통제였으므로 자유로운 순례가 가능하다면 십자군의 목표는 달성된 거다.

◆리차드 1세와 살라딘의 '결혼동맹' 추진

리차드 1세와 살라딘이 직접 대면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사절이 이슬람 영토 라믈라에서 협상하며 서로를 '형제'라 부르는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심지어 살라딘의 남동생 알 아딜과 리차드 1세의 여동생 조안을 결혼시켜 예루살렘 공동통치를 맡기자는 내용까지 논의했다. 현재 가장 신뢰받는 십자군 1차 사료 『십자군 원정기(ItinerariumPeregrinorumet GestaRegis Ricardi)』(1194년~1200년)는 물론 이슬람 자료에도 전한다. 물론 살라딘이 리차드 1세에게 말, 약, 얼음을 선물하는 우정의 징표는 후대 문학 작품에 다뤄질 뿐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2세와 이슬람 술탄 알카밀의 협정

팔레르모 대성당. 내부에 시칠리아를 통치한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신성로마 황제프리드리히 2세 무덤이 자리한다.
팔레르모 대성당. 내부에 시칠리아를 통치한 독일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신성로마 황제프리드리히 2세 무덤이 자리한다.

시칠리아 주도 팔레르모 대성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제6차 십자군(1228–1229) 주역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 무덤이 기다린다. 아랍어를 구사하며 이슬람 문화를 깊이 이해했던 프리드리히 2세와 이슬람 아유브 왕조 술탄 알 카밀의 1229년 2월 협정을 들여다보자. 리차드 1세와 살라딘이 무력 충돌했던 것과 달리 두 군주는 한 번도 싸우지 않고 협상으로 6차 십자군을 마무리한다. 1. 예루살렘 기독교 측 접수, 2. 성전산(알아크사) 바위돔과 모스크는 이슬람 측 통제, 3. 10년 휴전. 둘 다 강경파를 설득하고 "이념보다 현실적 이익을 우선하며 칼아닌 조약으로 평화를 일궜다"고 라틴어 『역사 선집(選集), Flores Historiarum』(Roger of Wendover, 1235년)과 『대(大)연대기, Chronica Majora』(Matthew Paris, 1240년대)는 물론 아랍 측 다수 사료가 증언한다. 직물과 향료, 말은 물론 책과 의료 지식도 주고받았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동 성지 예루살렘 시가지를 기독교와 이슬람이 사이좋게 나눠 지배하는 타협 속에 프리드리히 2세는 예수 그리스도 무덤 교회(Holy Sepulchre)에서 1229년 대관식을 치르고 철군한다. 십자군의 관용 타협 정신이 800여 년 지나 숱한 전쟁의 현대 지구촌과 극한 진영 갈등의 한국 사회에 유독 크게 울려 퍼지는 성탄절 세밑이다.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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