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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욱의 대구문화 오디세이] 대구 선교사와 신부의 발자취: 교육과 의료, 그리고 근대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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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조선의 고을 대구는 봉건적 질서와 전통 신앙이 지배하던 땅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낯선 서양인들이 찾아와 작은 불씨를 지폈다. 그들은 가톨릭 신부와 수녀, 그리고 개신교 선교사였다. 기와집 성당에서 시작된 미사, 좁은 사랑채에서 울려 퍼진 영어 수업, 약전골목의 '미국약방'에서 베풀어진 진료는 모두 대구를 근대 도시로 이끄는 출발점이 되었다. 신앙의 이름으로 찾아온 그들의 활동은 교육·의료·문화·사회봉사 전반에 걸쳐 지역민들의 삶을 바꾸었고, 오늘날 대구가 간직한 문화유산과 정체성의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로베르. 출처 계산성당 역사관
로베르. 출처 계산성당 역사관

◆영남 최초 성당과 사립학교의 탄생

1886년 한불수호조약 체결로 포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프랑스인 아실 폴 로베르(한국명 김보록) 신부가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었다. 1898년, 그는 마침내 대구 계산동에 한옥 성당을 세운다. 이것이 오늘날 '계산성당'의 기원이다. 이 성당은 1901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1902년 벽돌로 다시 지어져 1903년 축성식을 했는데, 바로 이 건물이 지금의 계산성당이다. 첨탑이 하늘을 찌르는 고딕 양식,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는 대구 사람들에게 '빼족집'이라 불릴 만큼 인상적이었다. 계산성당은 서울 명동성당, 평양 관후리성당에 이은 우리나라 세 번째 고딕 양식 성당으로, 영남 가톨릭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베르 신부는 교육에도 앞장섰다. 1898년 성당 부속 한옥을 개조해 '해성재'라는 사립학교를 열었다. 해성재는 뒤에 성립학교로 발전해 오늘날 효성초등학교로 이어진다.

아담스. 출처 대구제일교회
아담스. 출처 대구제일교회

◆대구 개신교의 출발과 영남 최초 중등학교의 탄생

1893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한국명 배위량)가 대구약령시에서 전도지를 나누며 대구 개신교의 씨앗을 뿌렸다. 배어드에 이어 대구에 정착한 이는 그의 처남, 제임스 에드워드 아담스(한국명 안의와)였다. 그는 1897년 11월 대구에 부임해 첫 개신교회를 세웠다. 그가 창립한 교회는 '남문안교회'라 불린 '제일교회'로, 대구·경북 최초의 개신교 교회였다. 1900년 그는 교회 대문채를 교실로 삼아 대남소학교를 개교했다. 이어 1906년에는 영남 최초의 중등학교인 '계성학교'를 설립했다. 초창기 27명의 학생으로 출발한 학교는 근대 학문과 기독교 신앙을 아울러 가르쳤다. 1908년 대신동으로 교사를 옮기며 영남 최초의 양옥교사 아담스관을 세웠는데, 이곳은 훗날 3·1운동 독립선언문이 인쇄된 역사적 공간으로 남았다. 계성학교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존슨 선교사. 대구제일교회 홈페이지
존슨 선교사. 대구제일교회 홈페이지

◆동산병원과 대구 사과

1897년 12월, 미국인 의사 우드브리지 오드린 존슨(한국명 장인차)이 대구에 들어왔다. 그는 약전골목에 '미국약방'을 열고 진료를 시작했으며, 1899년 12월에는 정식으로 '제중원'을 개원했다. 존슨은 천연두 예방접종, 학질 치료제 보급, 외과 수술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의료 행위를 통해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는 한국 청년들을 제자로 삼아 서양 의학을 가르치며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40여 종의 과일나무를 들여와 청라언덕에 심었는데, 이 가운데 미주리 품종 사과가 자라나 대구 사과의 효시가 되었다. 오늘날 동산의료원 주변에 남아 있는 사과나무 후손은 그 역사적 상징이다. 존슨은 의료와 농업을 매개로 주민들과 신뢰를 쌓으면서 '동산병원'과 '대구 사과'라는 유산을 남겼다.

미국약방 앞 존슨 선교사. 출처 대구제일교회 홈페이지
미국약방 앞 존슨 선교사. 출처 대구제일교회 홈페이지
사이드보텀과 에피 부부
사이드보텀과 에피 부부
1900년 무렵 피아노 운반 장면. 손태룡 제공
1900년 무렵 피아노 운반 장면. 손태룡 제공

◆전국으로 울려 퍼진 '첫 피아노' 소리

1900년 봄, 낙동강 사문진 나루터에 낯선 짐 하나가 내려졌다. 상여 막대에 매달려 사흘 동안 대구 시내로 옮겨진 그것은 '귀신통'이라 불린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는 오늘날 한국 교회와 음악 문화의 뿌리가 된 첫 피아노였다. 이 피아노의 주인은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리처드 헨리 사이드보텀(한국명 사보담)의 아내 에피 엘든 브라이스((Effie Alden Bryce)였다. 에피는 교회 오르간 반주자이자 피아노 교사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선교와 교육에 헌신했다. 현재 대구 사문진에서는 매년 가을 '달성 100대 피아노' 축제가 열린다. 낯설고 기이한 소리로 불리던 피아노는 이제 음악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42년의 간의 헌신…청년문화·여성교육의 태동

1899년 25세의 나이로 대구에 부임한 헨리 먼로 브루엔(한국명 부혜리)은 1941년 일제의 추방 명령을 받을 때까지 42년간 대구와 경북 전역을 누볐다. 그는 말을 타고 교회를 순회하며 56개 교회를 세웠고, 1915년 대구남산교회를 창립했으며, 1918년에는 대구YMCA의 전신인 '교남기독청년회' 설립에도 참여했다. 브루엔은 '안경 말'이라 불린 자전거와 사냥개 '마크'를 데리고 다니며 대구 최초로 서양식 여가 문화를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최초로 야구를 전파하는 등 젊은이들에게 스포츠와 신앙을 함께 전파하였다. 그의 아내 마르타 스콧 브루엔(한국명 부마테)은 여성 교육에 헌신했다. 1902년 제일교회 구내에 '신명소학교'를 세우고, 1907년에는 동산 언덕에 '신명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그녀는 '대구 여성 교육의 어머니'라 불리며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사회사업과 자애의 실천

1923년, 프랑스의 젊은 신부 루이 델랑드(한국명 남대영)가 대구에 왔다. 한국 이름 남대영은 '남쪽의 큰 불꽃'이라는 뜻을 지닌다. 50년 가까이 한국에서 가난한 이들의 벗이자 목자가 된 그는 1935년에는 여섯 명의 여성과 함께 '삼덕당'을 세워 훗날 '예수성심시녀회'로 발전시켰다. 교육·의료·복지 전반에서 활동한 그의 자애 정신은 대구 앞산에 세워진 '남대영 기념관'에서 이어지고 있다. 쉼터·문화·교육·영성 공간으로 구성된 남대영 기념관은 종교적 색채를 넘어 지역사회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한국의 마더 테레사, 엠마 프라이싱거 수녀

1932년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에서 태어난 엠마 프라이싱거는 1961년 대구대교구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29세의 젊은 간호사였던 그녀는 그 당시에는 2년만 봉사하려 했으나, 평생을 한센병 환자 곁에 머물렀다. 그녀는 한센병 환자 곁에서 두려움 없이 상처를 돌보고, 1962년에는 가톨릭피부과의원을 세워 수만 명을 치료했다. 또 재활과 장학사업으로 환자와 가족이 희망을 찾도록 도왔다. 사람들은 그녀를 '한센병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천사' 등으로 불렀지만, 정작 그녀는 '나는 그저 하늘의 수족일 뿐'이라고 하였다.

루이 델랑드 신부. 촐처 예수성심시녀회
루이 델랑드 신부. 촐처 예수성심시녀회

◆남긴 발자취, 기억해야 할 소중한 유산

신부와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는 단순히 신앙교육 기관을 넘어 근대 시민사회의 토대를 마련했다. 해성재, 대남소학교, 계성학교, 신명여학교는 모두 오늘날까지 이어져 대구의 명문으로 자리한다. 의료에서도 제중원은 동산병원으로 발전했고, 지역민에게 서양 의술의 혜택을 최초로 전했다. 문화 영역에서는 영어 교육, 서양 음악, 스포츠가 전파되어 지역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들이 남긴 발자취는 도시의 역사와 문화 속에 깊이 스며들어 나눔 문화의 기반이 되었으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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