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져 있던 신라 금관 6점이 100여 년 만에 국립경주박물관에 모여 떠들썩했던 지난 10월 말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는 금관 사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 속 금관은 우리가 익히 봐오던 빨간 좌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것이 아닌, 화려함과 위엄을 뽐내면서도 덧없는 세월을 말없이 품은 모습이다. 이 사진을 촬영한 이는 한국 현대사진의 거장으로 불리는 구본창 사진가.
최근 그가 대구 봉산동 꾸꿈아트센터를 찾아 이 금관 촬영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놓았다. 2008년 제2회 대구사진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으며 국제 행사로 발돋움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고, 경일대 교수로 10여 년 간 후학을 양성해온 그는 대구를 "남다른 애정이 있는 도시"라고 표현했다.
50년 가까이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해오며 백자, 탈, DMZ, 비누 등 숱한 대표작을 남긴 그였지만 금관 촬영은 섭외부터 쉽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물론, 경주 등 여러 박물관에 직접 편지를 수없이 써서 보냈다.
"앞서 조선 백자를 찍은 사진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게 된 전례가 있어 가능하지 않았나 싶어요.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다보니 백자를 내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겠다 싶은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고요. 하지만 섭외가 정말 어려웠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죠."
장장 7년의 기다림 끝에 2023년, 마침내 금관 촬영 허가가 났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판매하는, 자그마치 50만원의 모형 금관을 사서 수없이 촬영 테스트를 했다"며 "천이냐 종이냐, 색은 무엇으로 할 것이냐 등을 고민했고 일본에서 가장 좋은 종이도 사와가며 연습했었다"고 말했다.
보통 어두운 색을 배경으로 금관이나 문화유산을 찍는데 반해, 그의 작품은 황금색 종이를 배경으로 썼다. "바닥에 빛이 반사되는 느낌이 금관의 화려함을 배가시키는 것 같아 황금색을 사용했다. 드리개가 있어 금관을 공중에 띄울까도 생각했는데, 반사되는 느낌이 없어서 과감하게 드리개를 없애고 찍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다만 마냥 화려하기보다 세월의 흐름과 흔적이 느껴지도록 톤을 조절해, 묘한 질감을 연출했다.
"땅 속에 묻혀 세월의 흐름이 뚝뚝 묻어나는 발굴 당시의 처참한 모습이 사실 내가 정말로 찍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배경에 약간 흙 속에 묻혔다가 나온 질감을 일부러 집어넣었죠.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깊은 곳에서 나온 듯한 느낌이요."
금관 중 가장 화려한 천마총 금관을 찍을 때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촬영을 위해 금관을 꺼내 지지대를 해체하자마자 세움장식들이 무게 때문에 꽃봉오리 벌어지듯 활짝 펴진 것.
"금관을 꺼내 재촬영을 한 게 몇십년 만이니, 저는 물론이고 현장의 큐레이터들도 모두 당황했었죠. 결국 낚싯줄로 잡아당겨서 촬영하고 줄은 후작업으로 없앴어요. 휴관일인 월요일이나 폐관 후 저녁 시간을 이용해 총 사흘 정도 찍은 것 같은데, 학예사님들이 많이 고생하셨지요."
이처럼 현장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작가는 정해진 시간 안에 촬영을 끝내야 했기에, 관식을 찍을 때는 지지대 부분의 종이를 뚫어 가리는 등 순발력이 필요했다고 회상했다.
촬영하며 가장 기억에 남았던 금관은 뭐였을까. 화려한 천마총 금관도, 특별한 스토리를 지닌 서봉총 금관도 아니었다. 그는 "지금까지 발견된 금관 중 가장 작고 옥 장식도 없는 금령총 금관의 단순함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고, 가장 멋있다고 생각했었다"며 "금관뿐 아니라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관식들도 이렇게 아름답구나 하는 것을 촬영하며 느꼈다"고 했다.
사람은 시대 속으로 사라지고, 권력의 상징이었던 금관만 남아 그의 사진에 담겼다. 그는 "이걸 소유하려고 애썼던 사람들과 왕권, 그런 부질 없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결국 이렇게 물건만 덩그러니 남아있다는 느낌도 은연 중에 나타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펴낸 비매용 대형 도록을 전시 관람객들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감히 만질 수도 없고 가까이 볼 기회도 적으며, 항상 유리 속에만 있던 유물을 눈앞에서 바로 보고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감동이었습니다. 역사에 하나밖에 없는 유물을 길이길이 남기게 될 사진을 찍을 기회를 얻게 돼 정말 영광스럽고, 앞으로 많은 후손들이 금관의 아름다움을 느끼길 바랍니다."
작가는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함부르크에서 사진디자인을 전공했다. 1985년 귀국 후 한국 현대사진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으며, 간결하고 미니멀한 사진 언어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6월 사진작가 최초로 삼성호암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미국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SFMOMA), 휴스턴미술관, 일본 교토 카히츠칸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리움미술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꾸꿈아트센터의 '내가 본 창, 앤솔로지: 구본창의 사진책-기억의 아카이브'는 1992년부터 최근까지 발간된 구본창 작가의 사진책과 리플릿, 초기 포트폴리오와 희귀 도록까지 한자리에 모은 전시로, 내년 3월 8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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