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갈레 포트
스리랑카 남서부의 끝자락, 인도양의 거친 파도가 끊임없이 부딪히는 곶(Cape) 위에 시간이 멈춘 듯한 인구 약 11만의 도시 갈레(Galle)가 있다. 콜롬보에서 기차로 세 시간 달려 도착한 갈레는 낯선 여행자를 단숨에 17세기 유럽의 어느 항구 도시로 데려다 놓는다.
성곽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자동차 경적과 툭툭(Tuk-tuk)의 소음은 마법처럼 사라진다. 붉은 기와지붕 아래 파스텔 톤의 벽, 낡은 나무 셔터와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짠 내 섞인 바람뿐이다.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아시아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식민지 요새 도시라는 사실은, 설명보다 분위기로 먼저 다가온다.
갈레의 성곽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16세기, 향신료 무역의 거점을 확보하려던 포르투갈이 처음 요새를 쌓았고,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이를 거대한 화강암 성곽 도시로 확장했다. 이후 영국이 행정 중심지로 사용하면서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인은 바뀌었지만, 도시는 무너지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왔다.
갈레의 가장 큰 매력은 이곳이 결코 박제된 유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약 130만㎡에 달하는 성벽 안에는 지금도 학교가 운영되고, 법원이 기능하며, 주민들은 빨래를 널고 기도를 올리며 일상을 살아간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상점 주인의 인사가 성곽 안 골목을 채운다.
한때 네덜란드 관리들이 머물던 육중한 건물들은 이제 부티크 호텔과 갤러리, 카페로 변신해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서양식 건축에 열대 기후를 견디기 위한 넓은 베란다와 안뜰이 결합된 독특한 구조는 '갈레 스타일'이라 불리는 고유한 미학을 만들어냈다. 골목마다 무슬림 상인들의 활기찬 목소리와 불교 사원의 향 내음, 기독교 교회의 종소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이곳은, 동서양 문명이 가장 평화롭게 공존하는 접점처럼 느껴진다.
◆ 성벽을 거닐며 만나는 시간과 풍경
갈레 여행의 정수는 단연 성벽 산책이다. 해질녘이 되면, 한낮의 열기가 한풀 꺾이고 현지인과 여행자 모두가 약 3km에 달하는 성곽 위로 모여든다. 조깅을 하는 청년, 연인과 손을 잡고 걷는 노부부,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여행자까지, 성벽 위는 도시의 가장 느린 시간이 흐르는 공간이다.
올드 타운 걷기는 메인 게이트에서 시작된다. 영국 통치 시절 새겨진 문장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네덜란드 개혁 교회(Dutch Reformed Church)가 시야에 들어온다. 1755년에 지어진 이 교회의 바닥은 네덜란드인들의 묘비석으로 덮여 있다. 이름과 연도, 간단한 문구가 새겨진 돌바닥 위를 걷다 보면 삶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묘하면서도 경건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 옆에는 17세기 네덜란드 병원 건물을 개조한 올드 더치 호스피탈(Old Dutch Hospital)이 자리하고 있다. 한때 치료와 회복의 공간이었던 이곳은 이제 레스토랑과 상점이 들어선 갈레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고풍스러운 아치형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묘한 감각을 느끼게 된다.
동쪽 성벽 끝 유트레흐트 보루(Point Utrecht Bastion)에는 갈레의 상징과도 같은 하얀 등대가 인도양을 향해 우뚝 서 있다. 이 등대는 갈레에서 가장 사진이 잘 나오는 장소 중 하나다. 흥미롭게도 등대 바로 맞은편에는 이슬람 사원 미란 모스크(Meeran Mosque)가 자리하고 있다. 외관은 바로크 양식의 교회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이슬람 사원인 이 독특한 건축물은 갈레의 종교적·문화적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성벽 산책의 끝은 언제나 요새의 남서쪽 끝, 깃발이 펄럭이는 보루여야 한다. 이곳은 스리랑카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석양을 만날 수 있는 장소다. 해가 수평선에 걸리면 하늘과 바다는 붉은색과 보라색으로 물들고, 성벽 위에 걸터앉은 연인들의 실루엣이 그림처럼 번진다.
등대 아래쪽 라이트하우스 비치(Lighthouse Beach)는 성벽과 바위가 파도를 막아 천연 수영장을 이룬다. 수백 년 된 성벽을 올려다보며 에메랄드빛 바다에 몸을 담그는 경험은 갈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다. 조금 더 넓고 여유로운 해변을 원한다면, 툭툭으로 15분 거리의 우나와투나(Unawatuna)로 향하면 된다.
◆ 새벽의 어시장, 바다의 삶을 보다
갈레의 또 다른 얼굴은 성벽 밖 새벽 바다에서 드러난다. 밤새 조업을 마친 전통 배 오루와(Oruwa)가 하나둘 해변으로 들어오면, 해변은 순식간에 수산시장으로 변한다. 참치와 잭피시, 새우와 게, 랍스터까지 다양한 해산물이 펼쳐지고 즉석 거래가 시작된다.
상인들의 흥정 소리와 함께 시장은 금세 북새통이 된다. 해가 떠오르며 바다는 붉게 물들고, 또 다른 어선이 들어와 고기를 쏟아낸다. 생선들은 잠깐 사이에 팔려 나가고, 사람들의 표정에는 피곤함보다 만족감이 먼저 읽힌다. 비릿한 냄새와 질퍽한 바닥, 혼잡한 풍경 속에서도 이곳에는 묘하게 긍정적인 에너지가 흐른다.
항구 옆 어시장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어종은 물론, 열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신선한 생선들이 가득하다. 사고파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여행자들 역시 이 생생한 풍경에 매료된다. 이른 아침, 바다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갈레 사람들의 삶은 단단하고도 활기차 보인다.
◆ 아한가마 해변, 막대 위에서 낚는 인내의 시간
갈레 남쪽 해안을 따라가면 아한가마(Ahangama) 해변에 닿는다. 이곳은 스리랑카 남부의 전통 낚시 '리티판나(Ritipanna)'로 잘 알려진 곳이다. 바다 한가운데 박힌 나무 장대 위에 위태롭게 몸을 맡긴 채 외발로 서서 낚시를 하는 어부들의 모습은 처음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파도가 거세 배를 띄우기 어려웠던 시절, 스리랑카의 선조들은 지혜를 발휘해 이 독특한 낚시법을 고안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전해진 이 전통은 지금도 남부 해안에서 이어지고 있다. 얇은 장대 하나에 의지해 바다를 응시하는 어부의 모습은, 단순한 생업을 넘어 숭고한 의식처럼 보인다.
크로스바 덕분에 어부는 물 위 몇 미터에서 앉아 낚시를 할 수 있고, 물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최소화해 물고기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어부들은 점박이 청어와 작은 고등어를 낚아 허리에 찬 망태에 담는다. 해질녘, 수평선을 배경으로 실루엣이 되는 이 풍경은 <론리 플래닛> 표지를 장식하며 세계에 알려졌고, 스리랑카 여행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거친 인도양의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는 어부들의 모습은, 여행자로 하여금 삶의 무게와 존엄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품은 바다. 갈레는 그렇게 과거와 현재, 동서양의 숭고한 삶의 모습이 아름답게 교차하는 도시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 ymahn11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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