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22년, 그리고 14년.
지난 10월 29일 향년 87세로 별세한 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이 대중과 함께한 대표 프로그램의 시간을 숫자로 바꾸면 이렇다.
MBC '수사반장'은 18년, '전원일기'는 22년간 방송됐다. 또 드라마가 아닌 KBS 1TV 교양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에서도 최불암은 2011년부터 2025년까지 14년간 진행을 맡았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세 작품 모두 한국 방송사에서 손꼽히는 장수 프로그램이 됐다. 송해가 33년여 진행한 '전국노래자랑'과 함께 한국 방송의 '시간'을 이야기할 때 빼놓기 어려운 기록들이다.
◆18년 '수사반장'…시청자는 최불암과 함께 사건을 해결했다
1971년 첫 방송된 '수사반장'은 한국형 수사드라마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최불암이 맡은 박영한 반장은 범인을 잡는 형사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이해하려는 형사였다. 이 작품은 1984년 한 차례 종영했다가 1985년 부활해 1989년까지 이어졌다. 중간 휴지기를 포함하면 최불암은 18년 동안 같은 형사 캐릭터로 국민을 만났다.
한 배우가 한 캐릭터를 오랫동안 연기하면서 극중 직업과 현실의 배우 이미지가 겹치는 현상도 나타났다. 최불암 하면 수사반장, 수사반장 하면 최불암이었다.
그 인연은 방송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최불암은 2012년 경찰청 명예경찰관으로 위촉된 뒤 명예 총경에서 경무관·치안감으로 차례로 승진했고, 2024년에는 명예 치안정감이자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에 위촉됐다. 배우가 드라마 속 '박 반장'을 넘어 현실 경찰 조직에서도 상징적인 인물로 대우받은 셈이다.
이어 2024년 '수사반장 1958'에 다시 노년 박영한으로 등장하면서 드라마의 서사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세기를 넘어 이어지기도 했다.
◆22년 '전원일기'…국민과 함께 늙은 김 회장
최불암이 좀 더 길게 호흡하고 좀 더 짙게 인상을 남긴 작품은 '전원일기'였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22년간 방송된 이 드라마에서 최불암은 양촌리 김 회장을 연기했다. 한 작품 속 등장인물이 20년 넘는 시간 동안 실제 배우와 함께 나이 들었다. 젊은 시청자는 결혼해 부모가 됐고, 어린이는 성인이 됐다.
그 사이 김 회장은 계속 양촌리에 있었다. 최불암은 '전원일기'를 자신의 연기 인생에 '빛나는 날개'를 달아준 작품으로 기억했다.
한국 드라마에서 '국민 아버지'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붙는 배우는 여럿 있었지만 최불암에게 이 호칭이 특히 강하게 남은 배경엔 22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배우가 캐릭터를 연기했다기보다 한 세대가 김 회장과 함께 살아간 셈이다.
◆드라마 끝나자 이번엔 나그네의 밥상…2011년부터 전국을 걸었다
'전원일기'가 끝난 뒤에도 최불암은 우리 일상 속 한국인을 만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2011년 1월 시작한 KBS 1TV '한국인의 밥상'의 진행자가 된 것이다.
최불암은 전국 산과 들, 섬과 어촌, 농촌을 찾아가 지역 음식과 그 음식을 만들어온 사람들의 삶을 소개했다.
배우가 연기하는 프로그램이 아니었음에도 최불암에게 묘하게 잘 어울렸다.
마치 양촌리 김 회장이 드라마 밖으로 걸어 나와 전국 곳곳 농어촌 주민들과 격의 없이, 나그네처럼 밥 한 끼를 함께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게 다른 소위 '먹방' 프로그램과 결을 달리하는 요소였고, 곧 장수 프로그램의 동력이자 매력이 됐다.
2021년 '한국인의 밥상'이 방송 10주년을 맞았을 당시 특집편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프로그램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찾아 그동안의 삶을 돌아봤다. 제주 해녀와 산골 주민, 대가족 등 최불암이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만났던 평범한 사람들이 다시 주인공이 됐다.
10주년 당시 제작진은 최불암이 프로그램에 대해 자신의 방송 인생에서 가장 뭉클한 시간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고 전했다.
이미 '수사반장'과 '전원일기'라는 두 개의 장수 대표작을 가진 배우가 70대에 시작한 교양 프로그램에서 다시 10년을 넘긴 것이다.
◆70대부턴 전국 방방곡곡 찾아 밥상 이야기…후배 국민배우 최수종에게 넘긴 '3번째 대표작'
최불암은 2025년 '한국인의 밥상' 진행석을 내려놓았다.
2011년 1월 첫 방송부터 진행을 맡은 지 약 14년 만이었다. 프로그램 700회를 맞은 2025년 4월부터 후배 배우 최수종이 진행을 이어받았다. 최불암은 당시 "오랜 시간 함께해 온 밥상 이야기를 이제 든든한 후배에게 물려주고자 한다"며 바통을 넘겼다. 한 시대의 국민배우가 또 다른 국민배우에게 프로그램을 맡기는 감동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수사반장' 18년, '전원일기' 22년, '한국인의 밥상' 14년. 이 방송 기간을 단순히 더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불암이 오랫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도 대중이 쉽게 싫증내지 않았다는 사실은 후배 배우와 방송가가 분명 배우고 교훈을 얻을 대목이다.
형사 박 반장으로 18년, 양촌리 김 회장으로 22년, 전국의 밥상을 찾아다니는 길동무로 14년. 시대와 프로그램은 달라졌지만 시청자가 최불암에게 기대했던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말보다 표정으로 먼저 공감하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최불암의 진짜 세 번째 대표작은 드라마가 아니었던 '한국인의 밥상'이었는지도 모른다. 20·30대에 연기자로 출발한 최불암은 '수사반장'에서 정의로운 형사가 됐고, 중년에는 '전원일기'의 아버지가 됐다. 그리고 70대와 80대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밥상 앞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 나그네가 됐다.
나이를 먹을수록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줄어드는 것이 배우의 숙명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최불암은 오히려 나이를 먹으며 자신의 역할을 넓힌 셈이다. 형사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한 끼를 함께하는 길동무로.
그렇게 최불암은 마지막까지 '국민배우'라는 이름 안에서 한층 더 나이 들고, 또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떠난 자리에는 숫자보다 더 긴 시간이 남았다. 그 프로그램들을 보며 함께 늙어간 시청자들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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