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

잉크의 시간-21[승혜야, 여기서 모리셔스까지 거리가 얼마쯤 되는지 짐작할 수 있겠니?]빌딩 사이로 희뿌옇게 보이는 아득한 산을 바라보며 은유가 물었다. 비로소은유의 눈가에 실낱 같은 웃음이 걸렸다.

[그건 왜?]

[그래, 그냥. 우리 거기까지 걸어가 보지 않을래? 언젠가 네가 말했잖아.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도도에게 찬란한 날개를 달아주고 싶다고. 어쩌면부활한 그 도도가 지금쯤 우리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니][난 지금 집에 들어가야 돼. 벌써 작은 오빠가 쪽문을 열어놓고 날 기다리고있을지도 몰라. 우리 작은오빠는 내가 돌아올 때쯤이면 꼭 쪽문을 열어놓고기다려. 그건 나에 대한 따뜻한 배려도 되지만 끝나면 곧장 들어오라는 무언의 압력도 되거든]

내가 말했다. 은유는 잠시 발 끝으로 땅바닥을 콕콕 찍으며 서 있었다.[내가 전화해 줄게. 사실 우린 너무 바깥 세상을 모르잖니. 여태 우린 수족관 속의 금붕어들처럼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니. 그러니 우리, 실컷 한번 걸어보자. 내게 지금 가진 돈도 있어. 배 고프면 시장 같은데 들어가 순대도 사먹고 걷다가 지치면 아무 여관에나 들어가 자보기도 하자. 그 전부터 난 그러고싶었어. 다만 용기가 나지 않아 참고 있었을 뿐이야]

갑자기 은유가 수떨해졌다. 은유의 그런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가만히 말했다.

[너도 그럴 때가 있구나]

[나는 뭐 계집애 아니니. 그뿐인 줄 알어. 가끔씩은 술도 마셔보고 싶고, 성인만화나 연애소설 같은 책도 읽어 보고싶고, 야한 비디오나 사진 같은 것도훔쳐보고 싶어질 때가 있어. 그리고 아주 가끔씩은 사랑하는 사람과 어디론가 멀리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어]

[너, 지금 속이 거북하니?]

나는 망연히 맞은편 학교 유리창에 부딪쳐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은유가 꼭 속이 거북해 조금 전에 먹은 떡볶이를 덜퍽지게 게우는 것만같았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