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설-타인의 시간

젖어드는 저녁-9우리는 오랜만에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을 먹었다. 자리에 큰오빠와 언니가 없어 조금은 허전했지만 그런 대로 저녁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특히 작은오빠가 찌개를 구쁘게 끓였다며 좋아하는 갈치보다 그걸 더 맛있게 먹을 때는 어떤 뿌듯한 보람같은 걸 느낄 수 있었다.

[네 꽃을 보고 아버지께서 퍽 기뻐하셨어.] 저녁을 다 먹은 작은오빠가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내게로 다가와 그제야 생각난 듯 나직이 말했다. 싱크대앞에서 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나는 그만 석고처럼 굳어버렸다. 오빠의그 한마디가 왜 그리도 서럽게 느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만일 그때 소영이가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수돗물을 콸콸 틀어 놓고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내어울었을 것이다.

소영이는 약속대로 장미꽃을 꺾어 가져왔다. 한 송이가 아니라 색깔 별로 한송이씩 꺾어 가져왔다.

[고맙다, 소영아. 언니가 잊지 않고 소영이 생일 때 예쁜 걸로 선물해 줄게.]나는 소영이 보는 앞에서 달력을 들추어 소영의 생일 위에다 붉은 싸인펜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치고 {소영이 생일}하고 적어 넣었다. 나는 소영의 생일을 알고 있었다. 소영이가 돌아간 뒤 나는 그 꽃들을 화병에 꽂아 아버지의머리맡에 놓아드렸다. 저물녘에 내가 어렵사리 만든 메시지도 그 속에 꽂아두었다. 아버지는 그때까지 넉넉한 잠속에 빠져 있었고,아버지의 가슴에는여전히 어버이 날을 맞아 우리들이 바친 조화가 서럽게 꽂혀 있었다.설거지를 마친 나는 곧 책상 앞에 앉았다.

내게는 꿈이 있었다. 장차 시인이 되는 꿈. 지금은 은행에 다니는 언니가 있고 아버지께서 남겨 놓은 돈이 은행에 예금되어 있어 돈에 대한 궁핍은 그다지 겪고 있지 않지만 올해 안으로 언니-에겐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었다-가결혼하게 될 것이고 작은오빠가 내년에 대학에 들어가면 내가 대학에 들어갈내후년에는 상당히 돈에 대한 고충을 겪게 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나는대학에 들어가더라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가 장학금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건 확실한 보장책은되지 못한다. 내가 악착같이 공부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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