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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성동 원삼국시대 취락지

경주 황성동 907~2번지 일대에 분포한 원삼국시대 취락지는 일반 주거지가 아니라 철기제작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공방이라는 주장이 나왔다.계명대박물관 김세기수석연구원은 '황성동 원삼국 취락지의 성격'이라는 논문에서 이 유적에 살던 사람들이 1세기부터 형산강 본류인 서천 모래에서 사철을 채취하여 쇠덩어리와 같은 철재료를 만들고 이 재료로 도끼 화살촉 도자낫등 예리한 도구를 만들었다고 추정했다.그는 모래가 많은 강변에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분포한 주거지는 모두 18기로내부구조, 면적(4~6평), 출토유물이 거의 비슷한 점으로 보아 기능상 혈통상동질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취락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특히 내부시설중 화덕은 주거지 자체가 파괴된 3기를 제외한 15기에 나타나고,노지는 불을 피우면서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단순한 난방이나 취사용으로불땐흔적보다 훨씬 강하게 구워져 철을 달구거나 녹였던 곳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노지 옆에는 모루돌로 사용한 흔적이 뚜렷한 큼직한 돌이 놓인 유구가 4기나있어 화재로 폐기된 주거지에서 철기를 만드는 재료인 쇠덩어리가 다량 출토돼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주거지의 크기나 시설에서 개별적인 격차나 유물차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마을공동체적인 생산활동을 한 것으로 판단되며 공동체적인 생산활동을 하면서도분업이 이뤄져 사철을 채취하고 그것을 모아 한곳에서는 환원작업을 하고 이것을 단야공방으로 옮겨 기본적인 철기를 소규모로 제작했던 것'이라고 본 김씨는 사철을 환원하는데 필요한 목탄 저장소로 여겨지는 방형유구가 마을전체에2기 밖에 없는 사실이 분업의 근거라고 밝혔다.

김씨는 1세기초 부터 시작된 경주 황성동 철기제작취락은 3세기에 이르러 기술발달과 철기의 대량수요에 의해 철광석을 녹여 철을 제작하는 본격적인 황성동 제철유구로 발전되었다고 마무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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