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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타인의 시간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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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자국을 죽여 안방 문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쫑긋 귀를 열고 안방의기척을 살폈으나 그 어떤 기미도 느낄 수 없었다. 방안은 이미 불이 꺼진 뒤였다."씻고 자자"

젖은 머리를 매만지며 화장실을 나온 언니가 말했다. 언니는 저렇듯 천연덕스럽다. 일견 보아서는 조금전 큰오빠 방에서의 일도 깡그리 잊은 듯 싶었다. 그런 언니가 간밤엔 왜 그렇게 흐물거렸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잠이 안 와. 먼저 자"

나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얼핏 바라본 주방의 한켠엔 아직도 애물의 바나나봉지가 무심히 투그리고 있었다. 식탁 위에는 언니의 저녁밥이 그대로 놓여있었고, 싱크대 개수통에는 씻지 않은 그릇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언니가늦은 저녁을 먹을 참인지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커피 마실래?"

"더 잠 안 올 텐데"

"엷게 해서 마시면 괜찮아"

언니는 나의 대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지 주전자에 알맞추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 불 위에 얹었다. 나는 언니의 제의를 바나나에 대한 사과로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언니의 사과법은 늘 그랬다. 그제서야 바나나 봉지를 발견했는지 허리를 낮춘 언니가 손을 뻗었다. 안을 뒤적거리더니 싱싱한 몇 개를건져올렸다. 그리고 물었다.

"너도 하나 먹을래?"

내가 고개를 젓자 저녁 때 강팔지게 몰아붙인 자신의 행티가 있어서인지 더는 권유하지 않았다. 언니는 단박에 두 개를 먹어치웠다. 저렇게 먹고 싶은걸 아까는 어떻게 참았을까, 하고 나는 주전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투명한 유리 주전자 안에서 물방울을 튀기며 자그르르 물이 끓고 있었다. 식탁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언니가 커피잔을 찬장에서 꺼내고 있었다.언니가 묽게 만들어 준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작은오빠는 들어오지 않았다.나는 작은오빠가 궁금해 현관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달빛이 넉넉히 계단을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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