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지방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안동시 예안장터는 안동댐건설로 수몰, 지금은 옛모습이 흔적도 없지만 역사속에서는 더욱 큰 모습으로우리곁에 다가오고 있다.안동서 대규모 군중에의해 최초로 만세가 불러졌던 예안장터 만세운동은당시 일제 식민통치 기관인 예안면사무소에서 3월11일 오후8시쯤 신상면면장의 주도로 면서기들과 이시교 이남호 이광호 신응두 신동희등의 모의와 독립선언문 등사작업, 태극기 제작이 모두 면사무소에서 이뤄진 것이 특징.예안시위는 17일 새벽3시30분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에 올라 일제가 명치왕사후 대정왕즉위를 기념해 세워놓은 일제 지배 모욕적 상징물인 어대전기념비를 쓰러뜨려 깨어버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후 면소재지에 30명씩 3개조로 숨어있던 시위단은 일제히 시장통을 향해진격했고 일본경찰은 수비대까지 동원, 군중을 포위 진압에 나섰지만 이동봉등은 앞장서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향했다.
이때 15명이 일경에 체포되고 잠시 군중도 해산했지만 오후6시쯤 구금자석방을 요구하는 군중 1천5백여명이 몰려 일경은 칼을 빼들고 공포까지 발사했지만 아랑곳않고 돌멩이 기왓장 등을 던지며 항거했다.
또 예안면민 6백여명은 18일(음력2월17일) 안동장날 만세운동에 참여키 위해 밤새 산길을 걸어가 안동시위에 참여했다.
일경은 앞서 군중 해산과정에서 25명을 추가 체포했으나 면민들은 굴하지않고 22일 장날 오후7시부터 2차의거에는 2천여 군중이 몰려 동부동과 서부동 선성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당시 일경 2명이 군중에 포위되자 수비병들이 총을 쏘아 해산시키며 13명에게 부상을 입혔고 3명이 또다시 체포되는등 예안시위로 모두 50명이 1~2년의 옥고를 치렀다.
당시 선두에서 분전하던 이동봉은 일경의 혹독한 고문도 굴하지 않았고 법정서도 "천황을 폐하고 우리 황제를 세움이 어떠냐"는등 항거하다 주동자중최고형인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이듬해 11월 병보석 출감후 바로 작고했다.
안동대 사학과 김희곤교수는 "예안 만세운동 시위는 안동서 가장 먼저 일어났고 또 안동면 시위를 촉발시켰고 식민통치 기관인 면사무소와 면장이 주축이 됐다는데 큰 의미를 둘 수 있다"고 말했다.
〈안동.장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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